비박 장비를 구입하다.

누구 말대로 등산은 마약과 같다. 쉬는 날이면 산이 부르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황야의 아이, 따뜻한 옷 한 벌 선물받은 듯 들떠 있다.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새로 산 비박장비를 깔아놓고 마음은 벌써 능선을 오르고 있다.

집 앞마당에 비박장비를  깔아놓고 보니 허탈에 빠진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본 <내사랑 아이거(Nordwand North Face, 2008)>의 산악인들이 떠올랐다. 거의 맨몸으로 북벽을 오르는 두 사람을 떠올리면 내 꼴이 참 한심스럽다. 목숨을 걸고 산에 가는 건 아니지만,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채 산을 오르거나 비박을 할 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페리노 비비텐트와 준우 침낭(1500g). 굼벵이가 탈피하기 전 허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꼴이랄까.


비박용 텐트 - 페리노 비비텐트 
산악회를 따라다니며 풍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고독이란 맛을 씹을 수 있는 혼자만의 비박을 위해 텐트와 침낭을 구입했다. 비박용 텐트의 경우, 쓸만한 산악용 텐트는 가격이 60만원~100만원대라서 가격이 절반 정도인 페리노 비비텐트를 골랐다. 00사이트에서 우수회원 할인을 받아 30만원대 초반에 구입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몽벨 마이티돔(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음)이나 블랙다이아몬드 제품을 사고 싶었다. 

비박용 침낭 - 준우침낭

추석날 뱀사골야영장에서 봄가을용 침낭으로 하루를 지내본 결과, 동계용 침낭을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낭 역시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우리나라 침낭회사들이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2회사의 제품을 저울질 하다가 준우사의 침낭(슈퍼익스트림2 메릴, 1500g)을 선택했다. 준우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물건을 구매했더니 왠만한 홈쇼핑에서 파리는 것보다 몇 만원 더 싸게 살 수 있었다. 전화로 이것 저것 문의를 해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은 직원에게 감명을 받았던 것도 한 몫 했다.     


생애, 첫 비박을 시작하다.
어쨌든 비박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55리터 베낭에 두 녀석들을 집어넣었다. 문제는 침낭이 생각보다 부피가 커서 베낭에 안 들어가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겨우 설득해서 넣었지만 베낭의 절반을 차지하고야 말았다. 적어도 2박3일은 산에서 보내야 하는데 코펠과 식량, 그리고 옷들은 어떻게 넣어야 할 지 막막했다. 무게도 제법이다. 등산을 가는 건지 행군을 가는 건지 모를 정도다.

침낭 녀석이 베낭의 절반을 차지하고 말았다. 타프, 버너, 코펠까지 넣었더니 베낭님께서 용량초과를 외친다.



그래도 때때옷을 입은 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비박을 떠났다. 생각 같아선 지리산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경우 지정된 야영장 이외에는 텐트는 물론이고 비박용텐트도 사용하지 못한다. 국립공원 대피소의 협소한 잠자리와 다른 사람의 코골이에 고생을 해본 사람들은, 얼어 죽더라도 비박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무엇보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호흡하며 산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박을 선호하는 등산객들이 늘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 문의게시판에는 비박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례가 많다. 공단에서는 자연이 훼손되고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비박을 금지한다는 입장이다. 일부 등산인들이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최소한의 장비로 잠을 자는 근본 취지에서 벗어서 산에서 불을 피우기도 하고 삼겹살을 구워먹는 등 온갖 추태를 부린다. 고기 맛본 중이 더 무섭다고 산에서  뷔페는 저리 가라고 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생애 첫 비박은 지리산에서 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영남알프스로 잡았다. 밀양 표충사를 출발해서 저녁무렵 제석산 정상 근처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침낭을 펼쳤다. 2~3분 정도면 보금자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햇반으로 저녁을 먹고 수통에 가져온 위스키 한홉을 먹고 나니까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다. 영하의 기온은 아니지만 바람이 차갑다. 이제 때가 되었다. 따뜻한 침낭 안에서 비박의 즐거움을 만끽하리라.

노을이 지고 있다. 곧 달과 별이 들려주는 동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어이쿠,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다. 텐트와 침낭 크기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발을 넣은 다음 몸을 비틀면서 머리까지 넣어야 했다. 새 제품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텐트 밖에서 보면 비를 잘 막아줄 지 걱정이 앞섰는데 안에서 보니 제법 튼튼해 보였다. 침낭도 부피가 있어 그런지 발끝부터 감싸오는 온기가 제법이다. 

잠이 들기가 그래서, 침낭은 그대로 둔 채 몸을 굴려(이것도 요령이 필요한데, 침낭이 웬만한 추위는 막아주기 때문에 옷을 가볍게 입는 것이 좋다) 편지를 쓰고 위스키 한 잔을 더 마신다. 배를 깔고 무엇을 먹거나 책을 본 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다시 등을 돌리고 눕기를 수차례, 굼벵이가 허물을 뒤집어쓴 꼴이랄까? 그래도 입구를 열어서 하늘을 보니 별님이 나오셨다. 별똥별도 지나간다. 

비비텐트에 누워 있으니까 모 사이트에서 봤던 산악용 텐트가 눈에 선하다. 하늘이라고 불리는 끝없는 우주에 펼쳐진 별까지 닿을 수 있는 산이 있다면? 한 1백만년 걸어가면 가능하려나?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달라이 라마 텐진 가쵸가 쓴 <용서, 류시화 옮김>라는 책을 가져올 걸 그랬다. 누가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했던가, 이만하면 아방궁이고 행복하다.  
  

생애 첫 비박, 그래도 이만하면 산 위에서는 아방궁인 셈이다.


 
아쉬운 점 몇 가지 
 
 페리노 비비텐트

페리노(Ferrino) 비비텐트는 무게가 800g으로 가볍다. 하지만 내부에 렌턴을 걸 수 있는 고리와 휴대폰 등 전자제품을 넣어둘 수 있는 주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침낭과 텐트 사이의 공간이 좁아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결로가 가득 맺혀 있었다. 텐트 외부 중앙 지점에 고리가 있으면 줄을 연결해서 내부 공간을 확보하고 바람이 잘 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준우침낭
부피가 컸지만 따뜻했다. 특히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발싸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외부는 기본방수 기능이 없어 먼지나 이물질이 잘 묻을 것 같다. 또한 새로 산 침낭이라서 그런 지 거위녀석이 씻지도 않고 나와 동침을 한다고 느낄 정도로 이상한 냄새가 났다.

텐트 머리 부분은 책을 읽거나 간단한 음식물을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렌턴걸이, 휴대폰 등 전자제품을 보관하는 주머니는 없다.


텐트를 팽팽하게 설치해도 텐트와 침낭 사이가 좁다. 침낭이 환기구를 막고 있는 셈이다. 텐트 중앙과 침낭 사이에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할 듯 하다.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