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만에 찾은 제주도

 

1월14일 김해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반년 만에 입맞춤하는 제주도. 지난 여름에 자전거 여행을 다녀와서 한동안 제주도를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서귀포 위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한결님이 두 달 동안 방이 빈다며 쉬었다 가도 좋다는 문자가 왔다. 혼자 다녔던 여행, 이번에는 대학 선배와 함께 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선배 역시 아웃도어 활동에 심취해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행인이 되었다.

 

부산에서 배로 갈 계획을 짰지만 좌석이 없어 비행기를 탔다. 밤8시30분 제주도에 도착해서 예약했던 택시를 불렀다. 한결님이 알려준 대로 렌터카는 빌리지 않기로 했다. 최근 제주도에 눈이 많이 내려서 렌터카를 빌렸다간 낭패볼 수도 있고, 둘 다 주당이라 술 없는 여행은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보통 택시요금은 4만원. 서귀포에서 제주시까지 왔다가 빈차로 돌아가는 택시(5.16택시 또는 남조로택시)를 이용하면 반값(2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리무진은 제주도 곳곳을 둘러서 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택시는 1시간 이내에 서귀포에 도착할 수 있다.


⇢ osprey사의 항공용 백팩. 장거리 여행을 갈 경우 배낭을 보호한다. 136리터로 100리터 배낭까지 넣고도 남는다.
⇢ 비행기 탈 때 가스 라이터는 1개만 가져갈 수 있다. 취사용 가스통은 화물로 실을 수 있으나 휘발유는 안 된다.

제주시에는 눈이 별로 없었지만 한라산 기슭으로 들어갈수록 많은 눈이 내렸다. 택시기사는 내일 한라산 등반이 가능한지 탐방안내소(064-725-9950)에 문의를 해줬는데,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등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내일 새벽에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서 관음사 부근 야영장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어서 먹거리를 준비하지 못했다. 선배와 나는 공정여행을 나름 준수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최대한 먹는 걸로 계획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사님은 근처 마트에 차를 세워서 장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다. 장을 본 뒤 베이스캠프에 가기 전에 회를 먹기로 했다.

⇢ 친절한 남조로택시 기사님 연락처 : 017-558-4443

 


⇢ 쫄깃한 고등어와 찰진 방어회에다 부드러운 한라산 소주는 겨울 제주의 맛 


부산보다 회값이 비싸지만 부산에서는 찾기 힘든 고등어와 방어를 먹었다. 순한 한라산 소주(초록색 병)를 마시고 갈치국을 포장한 뒤 택시 기사님을 다시 호출해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새벽에 서귀포 위미에서 한라산 입구 성판악까지 택시비 1만5천원에 협의했다. 서귀포터미널에 가면 성판악으로 가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지만 완행버스를 탔다가는 개떼처럼 몰려다니는 등산객으로 기분을 잡칠 게 뻔하다. 늦어도 성판악에 새벽6시에 도착해야 한가한 산행을 할 수 있다.

 

빛그리미갤러리 그리고 위미초가

 

빛그리미갤러리는 주인이 부르는 공식 명칭이고, 나는 위미초가라고 부른다. 나도 그랬던 선배도 첫눈에 반한 모양이다. 오자마자 아궁이를 보더니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위미초가는 옛날 제주 초가집을 복원하고 내부는 현대식 방 구조로 되어 있다. 위미 초가는 옛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선순환 삶을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닷가에 널린 나무를 주워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을 한다. 안방은 현대식 보일러가 가동되지만, 가끔 옛날 방식으로 사는 게 좋다.

 
⇢ 파도 소리일까 눈이 내리는 소리일까? 위미초가에 와서 속삭이는 것들

선배가 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동안 나는 짐을 정리하기로 하고 문을 열었다. 낯익은 향기와 풍경이 안긴다. 거실에는 갓 시집온 귤이 낯설 뿐 천장이며 삐걱대며 앙다붙는 나무바닥, 위미를 추억하는 사진들, 모두 그대로다. 파도와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방안 놀다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볕이 좋은 날 마루에 앉아서 초가 돌담 너머 지귀도를 볼 생각에 흐뭇하다. 배낭을 정리하다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나가봤더니 삽살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물이 먹고 싶었던지 덥수룩한 털에는 눈이 잔뜩 묻어 있었다.


⇢ <빛그리미겔러리>는 서귀포시 위미라는 작은 항구마을 바닷가에 있는 초가집이다. 올레 5코스를 지나다가 보이면 들리면 다정한 분이 차 한잔을 내어 준다. 숙박도 가능하며 주인장 이름은 한결(010-3007-5551).

 

시간이 늦었지만 우리는 산행계획을 세웠다. 배낭 무게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텐트와 침낭을 가져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결론은 이곳에 다시 오기로 하고 가벼운 산행을 하기로 했다. 소형배낭을 가져오지 않아서 100리터 배낭에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비상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장비를 넣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주인장이 술은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지만, 한라산 소주 2병을 나눠 마시고 동계용 침낭에서 따뜻한 잠을 자고 말았다. 머리맡에는 커다란 제주 감귤 놓여져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오는 손님에게 공짜로 차를 내어주는 인심 좋은 주인장이 귤을 팔아서 운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구마도 못생긴 게 더 맛있다고 귤도 그런 모양이다. 시원한 귤을 한 개 까먹고 집 앞까지 찾아온 택시를 타고 성판악으로 향했다.

 

개떼들에게 고함 "제발 떼로 다니지 마세요"

 

서귀포에는 실눈이 날렸지만 성판악으로 가는 5.16도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기사님도 긴장을 하는 듯 보였다. 성판악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빈 자리가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관광버스를 타고 온 개떼님들이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대도 아니고 번호를 외치고 도떼기 시장 저리 가라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산행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고글을 쓰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둡고 좁은 등산로에 단체 관광객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앞지르기를 여러 번, 대여섯팀 정도를 따돌리고 한적한 산행을 시작했다.

 


⇢ 겨울 한라산 등산을 할 때 바람과 눈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는 겉옷(고어텍스가 아니더라도 내복과 옷을 여러벌 겹쳐 입으면 괜찮음), 장갑, 등산화, 아이젠, 마스크는 필수. 고글이 있으면 더 좋다. 

겨울 한라산은 성수기다. 천천히 가다가는 개떼들에게 "빨리 좀 가자"는 등 봉변을 당하기 쉽다. 그래서 주말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 한라산 산행을 하고 싶다면 평일을 추천한다. 올레길을 걷듯 가슴에서 뛰쳐나오는 숨을 고르면서 나지막한 숲길을 따라 한라산을 파고들 수 있다. 성판악(해발 750m) 코스는 거의 평지를 오르는 수준이기 때문에 초보자도 산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는 방한 장비를 단단히 갖춰야 한다.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8시. 보통 4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2시간 만에 오른 셈이다. 빨리 가는 산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달래밭대피소는 말 그대로 피난 대피소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탓에 대피소에는 이미 사람들의 입김과 컵라면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 지리산에는 팔지 않는 컵라면, 취사장을 따로 만들지 않고 한라산 환경을 살려보겠다는 고육지책이지만 씁쓸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국립공원은 철저하게 예약제로 운영된다. 성수기 때는 넉 달 전에 예약해야 오를 수 있다. 야영장도 배정받아야 하고 쓰레기 단속은 얼마나 철저한가.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우리나라처럼 관광버스 단체 산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혹자는 개떼산행을 허가 해야 지역경제도 산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개떼들은 관광버스로 이동하며 먹을 것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음식을 차에 실어와서 해먹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나 친구, 소수로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먹거리도 현지에서 사먹는다. 지역경제를 살리면서 자연을 살리는 일, 개인적으로 개떼산행 원천봉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라오름를 지키는 눈보라와 사람

 

대피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백록담으로 오르는 코스가 통제되었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폭설로 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을 다섯 번 올랐지만 한번도 백록담을 밟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올라왔던 길로 하산하기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사라오름(600m)에 들렀다. 사라오름(600m)은 진달래밭대피소에서 약 30분 하산길에 있다. 사라오름에는 산정호수가 있고 날씨가 많은 날에는 여신 한라산의 허리에서 머릿결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 산정호수에서 설인이 되어버린 선배의 모습
 

화이트아웃 상태에서 한라산을 볼 수 없었지만 눈 쌓인 산정호수에 앉아서 게 눈 감추듯 나타나는 수평선 끝자락 한라산 몸을 본다. 제주 오름은 참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오름에 앉아서 하늘거리는 나무와 풀들에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얀 눈보라가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지만 그래도 좋다. 눈이 내리지 않고 날씨가 맑았더라면 개떼들에게 사라오름은 짓밟혔을테니까.

 

하산길도 순탄치 않다.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올라오는 사람들의 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 개떼들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성판악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30분.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섰을 때 바로 버스가 도착했다. 배낭과 옷에 묻은 눈을 털려고 하는데, 버스기사는 어서 타라고 말한다. 어리둥절하게 타긴 했지만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버스는 만원이었고 몸에 딸려온 눈들이 홍수가 되어 의자를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했더니 괜찮다며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먹고 산다"며 웃는다. 도로는 빙판길로 변해 있었고 드문드문 눈속에 갇힌 렌터카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때 그 부드러운 기사님이 "개xx, 이런 날씨에 차를 끌고 나오냐"라며 경적을 울렸다. 기사님의 화끈한 말에 내심 박수를 보낸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 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5.16 구간을 운전하는 기사님은 제주에서 최고 엘리트라고 한다.

 


⇢ 눈길을 달려가는 버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불안해서 창밖을 보지만, 제주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다. 

시내 버스에서 순환버스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으면 5.16구간을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폭설이 내린 눈길도 봄과 겨울에 연수를 받았기 때문에 어느 코스에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 지 눈 감고도 아는 것이다. 제주사람들은 이 버스 기사님을 전적으로 믿는 듯 했다. 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나아가는 버스, 촌놈 둘이서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기사님! 개떼들이 탄 관광버스에 지지 마시고 늘 번성하지고 한라산도 개떼들로부터 지켜주세요"

 

서귀포 고향생각 고기국수, 다시 고향으로

 

서귀포 소방서 가는 모퉁이에 부산에서 시집온 애살스런 할머니가 운영하는 <고향생각>이라는 허름한 식당이 있다. 서귀포에서 잠시 방랑생활을 했다는 선배는 꼭 고기국수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돼지국밥 비슷한 데 밥 대신 국수가 들어있다고 하니, 느끼할 것 같아서 다른 걸 먹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서자 마음은 돌아섰다.

 

⇢ 서귀포 <고향생각> 064-763-6009

커다란 배낭을 매고 들어선 우리를 보자 할머니는 제주도 사투리로 어디 갔다 왔느냐며 묻는다. 주인만큼 애살맞은 선배는 이곳에 몇 번 왔었다면서 고기국수 두 그릇과 한라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열다섯명 남짓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허름한 이곳에는 네다섯 분 정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때 제주에서 선생님을 했던 주인 어르신은 풍이 오셨는지 몸이 불편해 보였다.

 

맞깔스레 무친 파김치와 배추김치, 새우젓 그리고 고기국수란 놈이 나왔다. '늙은 할매 손맛이니까 많이 먹어라'며 시식 결과가 궁금한 지 할머니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국물 맛은 돼지국밥보다 고소하고 담백하다. 면은 중면 정도로 얼마나 쫄깃한지, 거기다 대충 버무렸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할머니의 손맛이 가미된 김치와 곁들이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 말로만 듣던 고기국수. 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

할머니는 풍이 오신 할아버지에게 옛날 연예시절 비오는 날 해운대에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나냐고 묻는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웃으며 그제서야 배낭에 딸린 장비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으신다. 멀리 부산에서 온 촌놈들이 불쌍했는지 고기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배가 터질 듯 먹고나서 남은 김치를 싸달라고 부탁했더니, 곱으로 싸주신다. 할머니와 작별하고 제주에서 세 번째 같은 택시 기사님을 불렀다.

 

기사님은 위미초가에 가기 전에 외돌개에 들러서 관광가이드를 자청하셨다. 오후 2시, 마음은 벌써 위미초가 마루에 있었다. 따스한 오후 햇살 사이로 하얗게 내리는 눈발, 그리고 멀리 보이는 지귀도. 그 마루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있고 싶었다.

 

위미초가에 도착해서 바닷가로 달려가 나무를 주어왔다. 삼청교육대도 아니고 우리는 커다른 나무를 여러 번 초가로 날랐다.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하는데, 나무라도 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눈발이 거세져서 바닷가로 나가는 일을 그만뒀다. 올레꾼들이 까만 돌마당에 먹물을 찍으며 다녀갈 뿐 인적이 드문 날이다. 초가에 피오오르는 온기도 눈보라에 멀리 지귀도까지 실려간다.

 

⇢ 올레5코스에 걸린 조랑말



⇢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도가 추워졌다. 당분간 어쩌면 여원히 더운 지구를 쓰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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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