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로드무비 - 프롤로그

 

버스에 기대 한 시간쯤 잠을 잤다. 깨어 보니 사천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326, 선배와 남해(경남 남해군) 자전거 일주를 위해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930분 버스에 자전거를 실었다. 버스 짐칸이 넓어서 바퀴를 빼지 않고도 2대를 겹쳐서 실을 수 있었다.

 

남해 일주를 시작하기 위해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작년 이맘때면 벚꽃이 폈겠지만 꽃샘추위로 꽃망울만 맺혀 있다. 남해는 마음이 지칠 때 자주 왔던 곳이다. 자전거로 완주하겠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불혹이 가까워진 나이에 자전거라니... 신발끈을 조이고 옷 매무시를 고쳐본다.

 

이번 여행은 12일로 남해를 종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같이 온 선배와 동등한 실력으로 가보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 이미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선배는 키190cm에 몸무게만도 100kg을 넘는다. 힘이 장사인 선배를 따라잡기 위해서 폭이 얇은 바퀴로 바꾸고 XC용 신발까지 준비했다.

 

삼천포대교에 들어섰을 때 바닷바람이 몸을 밀어낸다. 이만희 감독의 유작 <삼포가는 길, 원작 황석영>에 나오는 뜨네기들의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처럼 나에게 있어 고향과 같은 남해, 그곳으로 미끌어져 간다 

 

물건, 항촌, 다랭이마을은 그대로 있을까?

정씨 옆에 앉았던 노인이 두 사람의 행색과 무릎 위의 배낭을 눈 여겨 살피더니 말을 걸어 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 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로 있을까요?-<삼포가는 길> 엔딩

장시기의 저서 <자유로운 몸으로 영화를 철학하다> 머리말에서 영화를 해석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는 여인처럼 자신의 몸을 영화의 스크린으로 접속하라고 했다.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순간 언어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자전거 여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눈과 두뇌로 여행을 한다면 내 몸이 자연과 호흡하는 데 장벽이 생기고 결국 몸까지 아파진다. 경로와 지도는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다. 설령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성취감은 운동선수의 절반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급함과 두려움을 버리고 몸과 자전거 그리고 길과 일치시키는 순간 고향, 이름, 목적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여행자는 현대화에 고향을 잃어버린 <삼포 가는 길>의 정씨처럼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 몸을 누일 수밖에 없다. 힘겨운 언덕에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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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로드무비 정보  *. 파란색 부분은 초보자도 가기에 좋은 길.

 


일정 : 2011 326~27 (1 2)

 

거리 : 200km 

 

1일차 주요경로 (Mar 26, 2011  ::  11:11 AM - 6:54 PM), 총거리 (80km)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 창선대교 동부대로 창선교 동부대로(물건리방향) 양화리 물건 항도 미조 미조로 송정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 양아로 두모마을 금평마을회관(신전리) 남해펜션타운 이동교 죽방로(왼쪽) 강진만로 쇠섬 선소리 선소로 남해시외버스터미널

 

2일차 주요경로 (Mar 27, 2011  ::  9:24 AM - 6:28 PM), 총거리(120km)

남해시외버스터미널 농로(남해119맞은편) 해안도로 설천로(1024) 진목마을(설천면) 모천마을(강진로) 문항마을 강진로 남해대교 노량로 남해대로 고현교차로(오른쪽 남서대로) 남서대로(77) 갈화느티나무 노구마을 남해스포츠파크 (서면) 남면로 (오리마을회관 앞 우측) 사촌해수욕장 – 다랭이마을(가천) 월포마을(이동리 방향 우회전) 남서대로 남해대로(좌회전) 죽방로(창선방향) 창선교 서부로(창선교에서 좌측) 해바리마을 율도 단항사거리(좌측 삼천포방향) 창선대교 각산로 중앙시장사거리(좌회전)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

#01 : 삼천포에서 남해읍까지

 

 

 삼천포대교를 건너 가면 늑도를 지나 남해창선대교까지 연결된다. 양쪽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곳으로 자전거를 몰아가면 된다. 길이 좁고 바람이 심해서 조심해야 한다.

창선교 아래 죽방과 쪽빛바다.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부대로를 따라서 창선다리까지는 약 16km 거리에 35분 정도 걸린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져 있어 쉽게 올 수 있다.

남해에 오면 꼭 들리는 우리식당(삼동면 지족리 삼동지구대 앞, 쌈밥 1인분 8,000원). 투박한 멸치찌개에 마늘과 반찬을 먹으면 먼 길을 가야할 라이더에게 힘을 실어 준다.

삼동면에서 4km 가다보면 왼쪽으로 양화리로 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경사가 높은 언덕이 있지만 차동차가 많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로 도로를 점령한 채 오를 수다. 대략 5km의 길이 끝나는 곳에 물건리 방조어부림이 있다.

물건 방조어부림. 보름 뒤에 오면 유채꽃 너머로 하늘보다 파란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을 것이다.

 

물건에 쏟아진 햇살에 데워진 몽돌밭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으면 좋다.

 물건에서 미조까지는 14km. 숨이 목까지 차는 언덕을 많은 곳이다. 남해 전체 코스중에서 세 번째로 꼽힐 정도로 힘들다. 목표지점인 남해시외버스터미널까지 80km 중에서 절반에 해당되기 때문에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한다.


미송로를 따라서 숨을 허덕거리고 나면 조로를 따라서 송정솔바람 해변이 나온다. 상주해수욕장보다 규모도 작고 관광객도 많이 없지만 남해 해수욕장 중에서 모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금포마을 해안도로. 봄날 남해에서 푸른 것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마늘밭이다. 푸른 것들이 품고 있는 작은 마을과그 사이로 난 고샅길을 순례하기 위해 달리는 라이더.

상주해수욕장 앞 바다에 오후 햇살이 밀려온다. 상주에서 남해까지 잘 닦인 아스팔트를 밟으면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자전거를 탄 심장은 골목으로 가자 한다.

우리는 양아로를 따라서 상주해수욕장에서 1.5km 지점에 양아리로 가는 길(양아로)이 나온다. 이 길은 상주 바래길로 불리는 굽이치는 언덕길이다. 19번 남해대로를 다시 만나기까지 약7km를 오르고 내려야 한다. 경사가 급해서 남해에서 두 번째로 숨이 차는 곳이다

 양아로가 끝나는 두모마을 언덕에서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를 만났다. 유보차보다 몇 백배 비싼 자전거지만 이 길에서는 할머니와 같이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대야 한다.

두모마을 굽은 다랑이논. 옛날 농부들은 구불구불하게 논둑을 만들면 홍수에도 강하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농기계로 농사를 짓기엔 불편한 모양이지만 미학적으로 굽은 다랑이논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어 좋다.


 

두모마을 입구에서 남해대로를 따라서 6km 가량 달려오면 금평마을(신전리)이 나온다. 남해 시내까지는 10km를 앞두고 있고 마지막 언덕이라 생각하고 하얀색 건물(남해펜션타운)을 목적지로 잡고 농로를 따라서 간다. 남해펜션타운에서 200미터 정도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한다.
 

죽방로를 달리는 라이더. 죽방로는 남해에서 자전거 타기 좋은 길 중에 하나다. 남해 선소리에서선소로, 강진만로, 죽방로를 따라서 지족마을까지 약 20km 거리다. 갯벌체험도 할 수 있고 아이들과 자전거 타기에도 좋은 코스다.

남해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선소횟집.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 터미널 앞 모텔에 자전거를 넣어두고 지역의 유력일간지 기자로 있는 선배를 만나 선소횟집에 들렀다. 회도 맛있지만 시원한 미역국과 지리매운탕을 최고로 꼽고 싶다.


#02 : 남해읍에서 다시 삼천포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왼쪽 무릎에 파스를 잔뜩 붙인 채 길을 떠났다. 남해교육청서1km 지점에 남해소방서가 있는 데 거기서 오른쪽 아래를 보면 바다로 이어지는 농로가 보인다. 해안도로는 한창 공사중인데 완성된다면 모천마을까지 12km.

바닷길이 열려있는 상장도와 하장도(문항리 설천면). 문항리어촌체험마을에서는 바지락, , 우럭조개를 캐는 갯벌체험이 성황이다. 다음 기회에 남해를 찾는다면 이곳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어도 좋을 것 같다. 문항마을에서 해안도로(강진로)를 따라서 남해대교가 있는 노량리까지는 8km.

노량 앞바다 위에 누워있는 남해대교.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 엔딩신에 나오는 다리와 닮았다. “그 동넨 그대로 있을까요?”

남해대교 아래에서 해안도로(노량로), 큰길(남해대로)와 만나길 여러 번 하면 고현사거리가 나온다.사거리에서 오른쪽 길(77번 남서대로)로 해서 서면까지 18km. 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평지라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노구 솔정교와 소나무. 갈화마을 노구마을까지는 제법 오르막이 있지만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있어서 쉬어가기에 좋다.

남해스포츠파크가 있는 서면에서 외식 나오신 할머니들과 함께 주차를 하고 자장면을 먹다. 똑같은 유머차에도 자세히 보면 이름표가 있다.

길가에서 봄나물을 손질하고 있는 할머니. 길에서 봄나물을 뜯으러 나오신 할머니를 자주 보게 되는데, 혼자 나오기 적적하셨는지 할머니를 닮은 견공을 데리고 나오셨다.


오리마을에서 선배와 헤어졌다. 선배는 창원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 남해읍내로 가는길을 선택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체력이 남아서 삼천포까지 갔다고 한다.

임포리 사천해수욕장.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혼자 가는 길은 외롭고 힘들다. 오리에서 선배와 헤어지자 마자 커다란 산과 같은 고개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남해의 숨겨진 보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선구마을에서 본 항도마을.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해서 버든으로 불렸다고 한다. 굽은 언덕을 넘으면 다랭이마을이다.
 

가천 다랭이마을. 남해를 수십 번 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다랭이마을을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내심 슬로시티를 기대했지만 밀려든 관광버스와 사람들의 술냄새에 허탈감이 밀려온다. 무릎 통증을 견디며 쉼없이 달려온 보람이 무너져 내렸다.   

개떼(관광버스로 이동하는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개떼관광을 비판하는 이유는 지역 경제에 별 도움은 되지 않고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데 있다. 먹거리도 마트에서 사와서 해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비인적인 관광은 자연과 현지인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다.

다랭이 마을을 벗어나 절벽을 끼고 내리막길을 5km 급경사를 내려오면 홍현마을이 나온다. 다랭이보다는 조용한 곳이고 전망도 좋다.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용소리, 화계리를 지나는 남서대로를 따라서 가면 이동면으로 갈 수 있다.

이동면 죽방 해안도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452.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서 가면 남해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금방이다. 결정을 앞두고 한참을 망설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종주를 할 수 있지만 30km 더 가야 한다. 몸은 남해로 가자고 하지만 남해에서 자전거 종주가 마지막일 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동에서 쉼없이 달려와서 다시 만난 창선교.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같은 길은 간다는 건 재미없는 삶이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바리마을이 있는 서쪽으로 돌아서 삼천포로 페달을 밟았다.

바다가 해를 삼켰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몸은 사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대를 안고 찾았던 다랭이마을이 최종 목적지에서 삭제되자 최종 목적지인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로 쉼없이 달렸다. 오버 페이스로 무릎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길은 자전거를 끌어주었다. 

630. 삼천포대교 끝에 섰다. 뒤를 돌아보니 태양이 '왜 그렇게 서둘러 가느냐'고 웃는다. 텅빈 대교 위에 누구 하나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차가운 손으로 더운 몸을 어루만졌을 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쏟아졌다. 서른여덟, 내 삶에 남해를 자전거로 완주했다는 점의 기록을 남겼다.


남해 로드무비 - 에필로그 

 

길을 걷고 있을 때 낯익은 옛 노래가 흘러 나온다. 삼류 로드무비의 OST로 제격이다.

 

 

n  1일차 경로



 

n  2일차 경로-1



n  2일차 경로-2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장돌뱅이가 되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부산에서 낙동강을 건너서 진해에 도착했더니 밤 10시. 배도 고프고 비가 내릴 듯 하여 경화시장에서 걸리와 부추전을 먹었다. 선배와 나는 취기로 비박장비를 메고 장돌뱅이처럼 고물자전거를 이끌고 안민고개 를 올랐다.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는 건 위험하지만 이 시간에는 차들도 별로 없다. 낮에는 안민고개의 가파른 경사가 시각적인 부담을 주지만 밤에는 하얀 차선만 따라서 오르면 된다. 

고갯마루를 100여미터 앞두고 커피 자판기가 있는 쉼터에서 거친 막걸리 숨을 토해내며 진해시 야경을 감상한다. 어둠에 익숙해질쯤 진해를 둘러싸고 있는 장복산의 가로지르는 임도가 어둠속에서 드러난다. 밤안개 너머로 누군가의 손짓에 이끌린 듯 자전거를 이끈다. 장복산 임도 또는 해오름길이라고 불리는 십리(4km) 비포장 길이 시작은 상쾌한 내리막길이었다. 

깜깜한 밤이지만 몇분을 달리지 않아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이유를 알 것 같다. 편백나무들이 만든 짙은 어둠을 뚫고 달빛을 받아 뽀얀 속살을 드러낸 비포장 임도에 자전거 바퀴가 춤을 추며 굴러간다. 새신을 신고 길을 달리듯 고물자전거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다. 코펠과 라면 봉지가 엇부딪치며 울리는 불협화음도 나름 운치가 있다.  

그때였다. 편백숲 사이로 번뜩이는 인광에 놀라 브레이크를 잡았다. 동행한 장돌뱅이 선배는 "이곳에 멧돼지가 자주 나타난다"며 조심하라고 한다. <차우,2009>의 식인 멧돼지가 커다란 이빨이 아른거린다. 멧돼지에게 들이박히더라도 보험을 들어뒀고, 막걸리를 먹은 장돌뱅이를 잡수실 리 없겠지 하면서 미꾸라짓국 먹고 용트림하듯 으스대며 숲속으로 전조등을 비췄다. 길고양이였다. 
 
무서운 얘기 해줄까? 지금으로부터 10년전만 해도 경화시장에 고양이를 팔았지. 고양이가 관절염에 좋다는 미신 때문에 고양이를 고아주는 장돌뱅이들이 있었지. 수십마리의 고양이가 좁은 철창안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어. 손가락으로 원하는 고양이를 가리치면 장돌뱅이는 고양이 목을 잡고 벽에 던져서 즉사 시킨 후 껍질을 벗지고 삶았지. 지금 그 장돌뱅이는 경화시장에 나타나지 않지만, 아직도 그 벽은 고양이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지. 가끔 밤중에 그 길을 가다보면 벽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밑줄 친 부분은 Fiction입니다.)

고양이 눈에는 고물자전거에 커다란 배낭을 매고 산길을 가는 두 사람이 그때 그 장돌뱅이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적당한 긴장감은 페달에 힘을 실리게 한다. 고양이를 부르기라도 하듯이 코펠과 참치캔이 달그락거린다. 왼쪽으로는 시커먼 편백숲, 오른쪽에 보였던 진해 시가지 불빛도 이제는 듬성듬성하다. 고양이 발톱에서 벗어나려는 쥐처럼 30분을 부지런히 도망쳤더니 황룡사 앞 넓은 마당이 나왔다.  

황룡사 약수터에서 물을 받고서 3분 정도 더 가서 인공으로 만든 계곡 옆 정자에 자전거를 세우고 짐을 풀었다.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타프를 깔고 침낭을 덮어쓰고 누우니가 영판 늦은 밤 주막을 찾은 장돌뱅이다. 피곤했던지 단잠을 잤는데 선배 말로는 밤에 무시무시한 번개가 쳤다고 한다.

진해 시내가 환히 내려다 보이고 지붕 있어 비와 이슬을 피하기도 좋다.



길을 잃은 제포와 삼포

다음날 새벽, 천자봉산림욕장으로 내려와서 부산방면으로 가다가 '제덕마을'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했다. 제덕마을은 음력 섣달 그믐날에 서낭제(성황제)를 지내는데 경상남도의 대표적인 동제로 꼽힌다. 옛날 이곳은 진해의 작은 섬을 연결하는 제법 큰 어촌이었다. 지금은 신항만 공사로 수도와 몇몇 섬들이 육지가 되었고 바닷길을 잃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다. 

80년대 어촌 풍경을 하고 있는 제덕마을. 지금도 연도나 소쿠리섬 할머니들은 장날에 연락선을 타고 제덕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진해로 갔다.


제포는 개발이 한창이다. 신항만 노동자들의 유입을 대비해서 주차장과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이곳은 장돌뱅이들에겐 헛장사라서 진해시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언덕을 오른다. 5분 정도 오르면 꼬불꼬불한 내리막이 나오는 데 그 아래 삼포가 있다.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길>과 제목이 같은 이혜민 작사 작곡 <삼포가는 길>의 무대이다. 

마을 입구에는 '삼포가는길'이라는 노래비가 있다. 버튼을 누르면 노래도 들린다. 이혜민씨가 고등학교 때 삼포를 지나다가 악상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정말로 구불구불한 산길이었고 그 아래 삼포라는 작은 어촌을 생각하며 노래를 끝까지 듣고서 삼포로 내려갔다. 

제포에서도 그랬지만 삼포도 옛날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포구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해산물에 소주 한 잔 먹으려고 했는데 깔끔하게 단장된 횟집들이 즐비했다. 돈 안되는 장돌뱅이들은 김이 빠진 채로 죔쇠를 돌려서 해양공원으로 달렸다. 진해 앞바다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길다방(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셨다. 신비의 섬이라고 불리는 앞바다에 뗏마가 정겹다.

뗏마는 원래 배와 배 사이에 짐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지만 지금은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배이다.


선착장에는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들은 없지만 할머니 서너분이 배에서 내린다. 오늘이 경화시장에 장이 서는 날인지 짐보따라기 제법 많다. 장돌뱅이의 최종 목적지와 일치한다. 할머니들에게 좋은 목을 내어줄 수 없다. 거친 매연을 뿜어내며 달아나는 시내버스를 쫓아서 경화시장으로 달려갔다. 

마트에는 없는 경화시장 5일장 


경화시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팔것도 살것도 없는 장돌뱅이지만, 경화동까지 왔을 때 아침부터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바쁜 모습에 피로가 부끄럽다. 대형마트에 밀린 재래시장이 그러하듯 5일장도 옛날에 비하면 초라한 편이라고 한다. 

5일장인 경화시장은 1955년에 개장했다. 해군 부대의 탄약을 실어나르던 철길위에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시장의 길이가 진해시 경화동 영신아파트에서 중앙고 삼거리까지 600미터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래도 좀약에서 똥개까지 마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들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쥐를 못 못 잡을 것 같은 새끼 고양이를 파는 할머니에게 농이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배가 고파서 시장 중간쯤 가서 먹자 골목으로 들어갔다. 

경화시장 먹자골목은 음식점들은 오래되어 헐고 너절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회, 칼국수, 호박중, 국밥 입맛 당기는 곳을 골라잡아 먹어도 될 정도다. 특히 골목 끝에 있는 '할매 장날 국밥'은 선지국밥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수육과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보슬비가 낡은 지붕위로 떨어지며 외친다. 한 잔 더, 한 잔 더. 다시 부산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둘이서 한 병을 나눠먹고 으로 갈라 먹고 부산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잔을 내려놓았다.

선지국밥이 유명한 장날 할매 국밥은 이곳에서 40년 넘게 장사를 해오고 있다.


2명이서 수육, 막걸리 1병을 먹었더니 배가 부르다. 거기다 쇠고기 국물은 덤으로 먹을 수 있는데 12,000원이다.


화장실을 가려고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지저분하고 냄새가 심했던 몇달전 화장실은 온데간데없고 펜션처럼 예쁜 화장실이 들어섰다. 내부도 깨끗하고 냄새도 없는 수세식 화장실이다. 하지만 장돌뱅이의 눈에는 시장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다.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외형이라도 그렇게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래식 화장실을 떠올리면 낡고 지저분하고 수세식 화장실은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알고보면 수세식 화장실이 더 지저분하고 환경파괴의 온상이다.  콘크리트로 대표되는 개발독재시대, 근대화의 유물이 수세식이다. 그래서 '근대식 화장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다. 경화시장에 자리잡은 반뜻한 이 화장실도 근대화의 그럴싸한 모사이자 편리함을 쫓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화시장에 들어선 화장실. 전통 시장과는


비를 피해서 선배 집에서 장돌뱅이들의 이동경로와 집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는 데 참 불편하다. 경로를 검색하면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길 위주로 나온다. 고물 자전거나 차가 없는 한적한 길을 찾기가 힘들다. 힘들다. 뭐, 어때. 그래서 가볼만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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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해시 병암동 | 할매 장날 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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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근대적 상투성을 비트는 이만희의 콘티뉴이티


영상학 석사과정 6기 윤정일



Ⅰ. 이만희의 영화생애와 선행연구

  1. 이만희 감독의 영화생애 약사

1931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만희 감독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주마등, 1961>을 시작으로 유고작 <삼포 가는 길, 1975>에 이르기까지 총 53편(<휴일> 최근에 발견)의 영화를 연출했다.1) 동고동락했던 제작자 호현찬씨는 이만희 감독의 초기작품 <다이얼 112를 돌려라, 1962> 칸에 승차한 후 독특한 몽타주에 놀란다.2) 여섯 번째 칸에 실린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은 국책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 스타일의 전쟁영화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3)

1966년, “다양한 영화를 모두 시도해보는 해로 삼겠다.”라며 이야기 하던 때 그의 불멸의 명작인 <만추>가 만들어진다. 같은 해 이만희 감독은 11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허문영 평론가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4)라고 이만희 감독의 가늠할 수 없는 연출력을 평가한다. 누구보다도 콘티뉴이티에 철저했던 그는 <삼포가는 길>을 편집하다가 쓰러졌고 1975년 4월15일 오후 6시30분 마흔 다섯에 세상을 떠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만희 감독은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대중에게 인기를 받았다.

이만희 기차를 좋아했고 기차를 소재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의 영화열차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로 칸칸이 채우고 있어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김소영의 말대로 이만희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려고 하는 경우 그나마 적합한 범주는 ‘무드’5) 정도로 보인다. 천재 감독 이만희의 영화 앞에서 학문적 이론과 평론이 아닌, 바보가 되어버린 관객의 심리로 본 소고를 시작한다.   


 2.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행연구 고찰

지금까지 이만희 감독의 논의를 살펴보면 이영일은 이만희의 작품세계를 행동적․심리적․상황적인 작품 계열과 리얼리즘 작품계열로 구분한다. 김수남은 미스터리, 전쟁영화, 사회적 리얼리즘, 멜로물 등 4 가지 경향으로 분류한다. 안병섭은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를 주제와 영화 표현방식 면에서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규정한다.6) 신강호는 전쟁영화, 스릴러영화,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액션 영화 등 크게 다섯 가지 장르로 나눈다.7) 최근 발간된 『만추, 이만희』는 이만희 감독과 밀접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정리하여 사료로 복원하였다. 다만 이론적으로 이만희 감독의 미학과 예술성을 뒷받침할 만한 깊이 있는 논의가 미흡하다.

문재철은 “서구적 의미의 작가주의인 작품 분석을 통해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세계관을 천착하는 것보다는 내용적으로 예술가 의식과 같은 보다 치열한 자세를 요구한 것이 특징이다. 이점에서 이만희 감독은 한국적 작가 개념에 가장 근접한 작가의 자리에 있다.”8)라고 정리한다.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60-70년대 충무로에서 활동한 감독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이만희 감독은 분명 작가의 반열에 위치해 있었다.


이만희는 분명히 자신의 영화작가로서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의 영화작가 가운데서 선배와 현역을 통틀어 몇 사람 안되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감독이라는 직능적 재능에 능숙한 사람들에 비해 분명한 작가의식이 더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9)


본 소고는 당대 영화의 상투성과 체제 앞에서 뛰어난 연출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유희했는 가에 대한 탐색이다. 숭고함과 유머스러움의 대비를 통한 새로운 메시지의 전달, 통속성에 대한 신랄한 언어유희, 대사의 절제와 실험적인 몽타주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만희 감독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보려 한다.. 


 3. 연구 문제

  가.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산을 재주 넘듯 넘어가는 폭주기관차처럼 연출하는 이만희의 스타일에 주목하고, 숭고함과 코믹 대비를 통해서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와해되는 지 살펴보고,  

  나. <7인의 여포로>로 기습을 받은 그의 영혼은 멜로드라마 <만추>와 <귀로>에서 치유된다. 당대 멜로드라마의 통속성을 거부하고 절제된 영상미와 실험적인 몽타주로 멜로드라마를 예술적 경지에 요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다. 유고작인 <삼포가는 길>에서 압축과 생략, 무음의 미학으로 문예영화의 한계를 넘어서 작가의 반열에 올랐는지에 대한 검토이다. 


Ⅱ. 본 론


 1. 이만희와 전쟁영화

이만희 감독은 전쟁과 군인을 소재로 총 11편을 만들었다.10) 호현찬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만희의 연출 스타일은 집요할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마지막 장면에 해병 4만명, 뇌관 5천발, TNT 1천5백발이 사용되었다.11)


삼포가는 길 라스트 부분에서 헤어지는 장면인데 열차 역의 다이알이 나오는데, 만추에서도 다이알이 나온다. 간이 역사에 유리창이 있는데 그 유리창에 구멍을 총으로 쏴서 내고 균열 생기는 장면을찍고 그 시야로 밖을 보는 것을 찍었다. 또 국보급 도자기를 영화 소품으로 썼다는 일화에서 장인근성. 도한 영상을 잘 구성하려고 <창공에 산다>에서 간첩선을 제트기가 쏘는 장면이 있는데 공군에다가 실제로 소금배를 쏘아달라고 요청하다가 안되서 특수틈에서 처리했고, 공중장면에서 연습비행기 30~40대를 다 움직였다.12)


데뷔 2년차 감독에게 대규모 재정적 지원이 되었다는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먼저 당시 한국영화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3년부터 1971년은 영화법이 제정된 후 영화산업은 연간 100~200편이 넘는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우수영화 보상제도’, 제작과 수입을 일월화시킨 정부의 정책도 한몫을 했으며 또한 채찍으로‘사전 각본 검열’과 ‘사후 실사 검열’등 제도도 있었다.13)

동시대 제작자들은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이용하여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만희 감독 역시 혜택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이 군인 출신이라는 점보다는 그가 만들어낸 전쟁영화를 연출하는 스타일이 인정된 부분이 크다고 본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한국영화사상 최대 제작비 1억원이 들어갔으며, 미니어처를 이용한 특수촬영과 공중전 등 해군과 공군과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작품이다.14)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도 대부분이 실제군인들이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는데 구일병 역의 이대엽은 그때 파편을 맞자 한쪽 눈이 지금도 불편하고, 엑스트라 한명은 폭탄에 한쪽 다리가 날아갔다고 한다. 15)


유지형의 회고에 따르면 이만희 감독은 헐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을 앞두고 미 해병대의 유황도 상륙작전 활약상을 그린 존 웨인 주연의 〈유황도의 모래, 1949>를 조조 상영부터 마지막 회까지 계속 보았다고 한다. <YMS 504의 수병〉을 기획할 당시에는 미국과 독일의 잠수함의 대결을 그린 딕 파엘(Dick Powell)감독의 〈상과 하, 1957>, 〈PT109, 1963>를 연상하면서 스펙터클한 바다 위의 해전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16)


 2. 전쟁영화에서 리얼리티와 코미디의 충돌

동시대 감독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관철시켰다면 이만희 감독은 달랐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이면에 포착된 반전의 메시지가 깔려 있다.17) 산을 뒤덮은 중공군이 몰려오는 장면 등은 이만희가 구현한 웅장한 숭고미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관객은 전쟁장면에 압도당하지만 그것은 이 감독의 던지는 메시지를 가리기 위한 장치이다.

이만희 감독은 먼저 적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지막 장면에서 해병들이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것은 특별히 신경 쓴 설정18)이다. 적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북한군은 대부분 풀 쇼트나 익스트림 롱 쇼트의 이미지로 처리된다. 이만희 감독은 전쟁이라는 장기를 벌려두고 말을 옮겨 가듯 전투 자체를 리얼하게 묘사한다. 이미 적으로 규정되었다면 이만희에게는 적이 아니라 몰개성적인 하나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좀비와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들에 맞서다 전사하는 해병의 모습은 슬로모션으로 처리한다.

두 번째로 반전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코미디와 리얼리티는 곳곳에서 충돌하게 콘티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에서 부대가 중공군의 반격에 전멸해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웃음이 작동한다.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등은 총알도 피해가는 영웅이 아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으로 묘사된다. 특히 코믹적 인물(구봉서)을 통해서 영화적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전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전쟁의 극한 상황과 일상의 유머를 대치시킨다. 구봉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밥’에 집착하고 참호 속 분대원들은 태연하게 식사를 한다. 이어서 전투 장면은 숭고한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숭고와 웃음의 게임 하듯 넘나드는 이만희의 전쟁영화는 코미디영화적 요소가 함의되어 있다.

리얼리티와 현실을 초월한 코미디의 대비는 구술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이만희 감독은 실탄을 사용하여 감독이 직접 배우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배우 양택조는 “그런 곡절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한끝의 타이밍만 어긋나도 총에 맞아죽는 상황에서 촬영을 했다. <고보이강의 다리>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베트남에 두 번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 가면 전쟁 영화를 돈 덜 들이고 찍을 수 있었거든. 거기서 정말 실탄을 사용해서 영화를 찍었다.” 19) 실탄을 쏘는 감독과 그의 장기판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모습 그 자체가 지독한 코미디다.  

웃음의 역사를 기술한 바흐찐에 의하면 웃음은 엄숙함의 극한적인 표현인 공포를 굴복시켰으며, 공식적인 생활로 숨막혀하던 중세시기를 카니발적 세계라는 통풍구를 마련한 주역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20) 물론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대안적 이데아를 표출하는 담론적 방식이 아니라 그만의 영화적 방식으로 넘어서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멜로21)와 코미디가 있지만 충돌하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부 해병들이 인민군의 건물을 점령했을 때 그 안에는 한 병사의 누이동생이 죽어 있고 병사는 절규한다. 술집 씬에서는 영희와 병사들이 어울리는 장면은 멜로와 코미디가 자연스럽게 합치된다. 결국 멜로와 코미디적 분대원들의 죽음은 비극으로 승화된다. 엔딩에서 이만희가 던지는 전쟁의 의미는 살아남은 분대원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한국영화사에서 문제작으로 기록되는 <7인의 여포로>22)는 이만희와 정권이 충돌한 코미디적 사건이다. 반공사상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인민군 묘사 등 몇 가지 문제로 반공법에 회부된다.23) 감상적 민족주의, 국문묘사가 허약, 북괴병사를 찬양, 양공주참상 과장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이 사건으로 이만희는 <만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는다.24)


 3. 통속성에 대한 언어유희와 침묵으로 저항

쇠사슬에 묶인 청부업자가 철수라는 또 다른 청부업자에게 쇠사슬을 끊어 달라고 부탁한다. 철수가 “나는 신의가 있는 악인”이라며 도와줄 테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한다. 청부업자가 다가온 철수를 때려눕히고는 한마디 던진다. “이건 악인의 상식이야. 신의 있는 악인? 개나발통이다.”

<쇠사슬을 끊어라>25)는 이만희 감독의 스타일과 동시대 영화의 통속성의 충돌이 절정에 도달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리얼리티와 충돌했다면 <쇠사슬>에서는 통속적인 영화언어와 대결한다. 관객의 허를 찌르는 신파적인 대사의 적대자는 다름 아닌 당대 한국영화의 통속성이다.

조영정은 <쇠사슬>은 너무도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되어 미처 눈치를 챌 수 없게 만든다고 평한다.26) 1960년대 스릴러 액션 장르는 대중성을 담보한 신진 감독들에 의해 활성화되었는데, 스타일의 진보와 소재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플롯의 허술함으로 비판받았다. ‘액션은 강조되지만 스릴러는 약했던’이 영화들은 멜로드라마와는 달리 스릴러 액션영화는 남성 관객이 주 소비층이었는데 유사한 장르로는 검객물을 들 수 있다. 검술영화는 1960년대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린 마카로니 웨스텐(Macaroni Western)과 <007>시리즈, 홍콩 검객물의 바람이 남긴 것이다. 27)

김철수(남궁원)가 일본 경찰에게 고문당하는 장면에서“야 아프잖아 왜 자꾸 때려”라는 대사는 그가 정보부요원에게 취조를 당하던 장면과 매치하면 자전적 웃음으로 승화된다. 장동희가 인본일 감별사를 취조하면서 “저기다 묶어 줄테니 얼어 죽지 마라”라고 하자 “고맙습니다. 얼어죽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쇠사슬>에서 이만희 감독은 자신이 거부했던 것들과 충돌하며 씩씩대며 기관차를 몰아간다. 일본군을 유인하는 장면에서 스키를 타고 영화 곳곳에서 신식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등장한다. 한강고수부지를 배경으로 만주인냥 말을 달린다. 또한 독립군이 아지트에 도착하자 두 남자를 버리자 그들은 손을 흔들며 아무렇지도 않게‘안녕’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이 독립군을 습격하지만 그 상황에서 달건과 태호는 태평하게 농을 주고 받고 불을 쬐는 데 뒷 배경에 한강 모래 채취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씬에서 자갈밭은 어느새 강으로 변하고 수중전이 펼쳐진다. 달건은 날아온 총알을 피하는 흉내를 내며 기존 영화의 진지함을 조롱한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와 많이 다르다. 첫장면에는 달리는 기차, 커다란 피스톤이 증기를 내뿜고 태호가 필사의 추격씬을 벌이는 장면이 있지만 삭제되었다. 30년이 지나서 리메이크 된다.

이만희의 영화언어의 핵심에는 설명조의 대사를 거부하는 이만희 침묵의 언어에 있다. 시나리오상에서 씬 110번 시나리오28)를 살펴보면,


철수 : 야아, 살아있었구나, 너희들!

달건 : 자식 금불상은 어떡했니?

태호 : 돈은?

달건 : 다 주어버렷구나 네 마음까지

태호 : 너답다 나도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 그들이 왜 죽어갔는가를... 조국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야.

철수 : 옳아 가자.

달건 : 어디로?

철수 : 몰라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조국을 위하여 뮛인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조국을 위해 숭고와 고믹한 그들의 삶과는 도저히 연결할 수 없음을 이만희는 알고 있었다. 허달건과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배경음악만 깔리고 대사와 현장음없이 처리되는데 말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많은 말을 한다. 근대적 계몽영화를 거부한 이만희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세 사람은 ‘태양을 잡으러 가자며’침묵하며 황야를 달린다.


4. 무음과 절제로 삼포를 가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멜로드라마가 번성29)하기 전에 이미 <만추>30)와 <귀로>31)를 통해 멜로드라마 색다른 진수를 보여주었다. <만추>는 이만희 감독이 대사 없는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에서 이루어졌다. 대사가 절제되고 영상이 전면에 부각된다.


심상의 무음으로 표현한 부분(개찰구의 역무원이 혜림의 기차표에 펀치를 찍는 소리를 과장된 음향, 이후 훈이 객차에 올라 혜림의 곁으로 다가와 서는 때까지 무음의 세계로 간다. 심상을 영상을 통해서 강조하기 위해서 영화에서는 기관차가 뿜어내는 수증기며, 수증기만 뿜어내는 기적의 클로즈업을 썼다.32)


만추는 필름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허문영은 <귀로>를 엄격하게 통제된 멜로드라마로 보았다. 여인의 남편은 6.25 참전 장교이며 불구의 남성인데, 그는 종종 군가를 틀어놓고 군복을 입는데, 한국영화에서 군가와 군복이 불길하며 억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군인-남성-가부장 동맹으로 지탱되는 1960년대 한국사회의 무기력과 억압적 질서를 이처럼 맹렬하게 비난하는 영화가 검열을 통과한 이유는 오직 이만희 감독의 영화의 세련된 수사법 때문일 것이다.33)


<귀로>는 <만추>가 그랬던 것처럼 스토리가 아니라 방황하는 여심의 델리커시에 보다 높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플롯보다는 영과 육의 갈등에서 방황하는 문정숙의 미묘한 심리묘사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귀로>는 텅 빈 서울역 광장, 직립해있는 가로수, 숲의 흔들림, 불 꺼진 가로등, 회전을 멈춘 녹음기, 비 개인 새벽하늘 등에서 보다 많은 영화적인 언어가 숨어 있는 것이다.34)


무음으로 문정숙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한 것은 멜로드라마를 예술적 경지에 이르게 했다. 멜로드라마가 번성하던 시기에 이만희 감독이 쇠퇴한 문예영화35)를 선택하게 된다. 당국의 검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문예영화를 선택하고 이만희 감독의 <귀로>와 <만추>에서 선보이지 못했던 그만의 영화를 <삼포 가는 길>36)에 투영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삼포가는 길>을 문예영화로 분류된다. 문예영화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라는 의미인데 개념상 혼란으로 인해 논란이 되어왔다. 현재는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라는 의미에서,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에서 사용되고 있다.

조윤주는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과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한국 영화담론에서 대표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꼽는다. <오발탄>을 네오리얼리즘의 경향, <삼포 가는 길>은 이만희 감독의 완숙기에 이른 리얼리즘이 구현된 영화로 평가한다.37) 또한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삼포 가는 길>은 사회비판적인 원작소설과는 달리 1970년대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 위주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긍정적인 것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은 문학작품이 아닌 영화텍스트로 분석하고, 무엇보다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긍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영화 도입부에 눈밭을 걸어가는 삐딱한 허수아비가 세 번 등장한다. “삐딱하구나, 이 노영달 신세 닮아버렸구나, 니미럴”라는 대사에서 “고양 좋아하는 니기미,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등으로 시작되는 대사는 근대화에 대한 지독한 냉소로 보인다. 또한 세 주인공은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조우하는데, 근대화의 심장인 고속도로에서 백화는 용변을 보고 서로 상서러운 대화가 오고 간다. 그들은 길이 아닌 눈밭 위를 끊임없이 걸어간다. 이것은 구도자적이기까지 하다.

이만희 감독이 근대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하기 위해 무음과 실험적인 몽타주로 대표된다. 시골 축제 현장에서 라이브로 찍은 듯한 컷은, 무엇이 영화이고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기 힘들며 이곳에서 처음으로 무음이 사용된다.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세 사람의 정겨운 풍경을 다큐멘터리를 연상하게 한다. 초상집에서도 드러난다. 노영달이 상갓집에서 사기를 치는 코믹한 장면은 대사없이 무음으로 처리하고 염불 소리를 인서트 한다. 이어서 상가집에서 술판을 벌이다 쫓겨나고 세 사람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은 무아지경의 경지로 이끈다.

백화와 영달이 서로에 대한 교감은 들판의 쥐불놀이로 묘사된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달리 쥐불놀이는 고향이 없는 쓸쓸함을 표현했다. 다만 이 장면에서 저녁무렵 촬영된 컷에서 완전히 어둠으로 나타나는 데 이만희 감독의 특성상 완벽함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흠은 의문이다.

시장에서 백화가 혼자 남게 되고 방황하는 장면에서 무음이 사용된다. 잠시 백화의 숨소리가 들리고, 부둣가까지 무음이다가 음악이 잔잔하게 인서트 된다. 그리고 혼자서 길을 걸어가는 풀 쇼트로 보여준다. 아무런 대사없이 이만희 감독이 보여주는 쓸쓸함과 고독의 미학이다. 그러다가 다시 백화의 모습이 크로즈업 된다. 과감한 크로즈업 역시 기존의 문법을 깨는 이만희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역에서 백화와 영달,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직전에 헤어진 두 사람이 할 말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만희 감독은 철저하게 대사를 들어낸다. 백화가 떠나자 영달은 흐느껴 울고 정씨가 표를 사서 돌아서는 부분부터 무음이 시작된다. 영달이 백화를 돌아보는 장면에서 몇 프레임 스틸로 잡히고, 백화가 표를 든 장면, 개찰구를 나서는 장면 등에서 정지화면으로 영상미를 극대화 한다.


“이만희 감독은 가능하면 철저히 영화 대사를 줄이자고 했다. 연출자가 영화 대사를 따라가면 감독의 이미지를 연출하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 이만희 감독은 말의 내용보다 말이 없는 영상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대사 없는 장면에 상당히 주목했기 때문에 자세히 써주길 원해 열심히 썼다. <만추>에서도 우동집 앞 장면에 대사가 없다. 대사를 절제하는 것이 기본 약속이었다.”38)


원작 『삼포 가는 길』과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을 비교하면 두 작품의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개작된 시나리오에도 만족하지 않고 #63에서 #76까지의 시나리오를 단 3씬으로 몽타주한다.  


#63 공사판

영달  착암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데 정씨가 다가와 그 등을 쿡 찌른다.

정씨  난 지금 떠날까 하오

영달  네 아니 그렇게 고향에 와서 왜

정씨  사실은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라오

영달  ...?

정씨  내가 형무소에 있을 때, 아니 공사판에서 만나 친구던가... 아무튼 누가 입만 열면 삼포라는 곳을 애기합디다... 그래서 와 본 것 뿐이오.

영달  그래요? 그러나 저러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떠나기 뭘 떠난다고 그러쇼? 일자리도 널려 있겠다. 이 겨울은 여기서 잘 보낼 수 있겠는데! ...

# 74 ~ 75 버스 정류소 ※ 필순의 모습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 76 삼포

이제 정씨의 고향이 아니고 영달의 고향이 된 삼포-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엔드 마아크-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 안에서 삼포가 육지로 변했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불안해하는 정씨의 모습을 크로즈업된다. 이어서 벚꽃핀 봄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시간의 비약) 버스가 다리를 건널 때 줌 아웃하여 롱쇼트로 끝을 맺는다.

이근삼은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에서 열의와 감독의 집요한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보여주었다고 평한다. 보통 영화와는 달리 <삼포 가는 길>은 전편을 통해 설경 하나만을 주배경으로 밀고 나갔음에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고, 한 사건에 대해 필요 이상의 긴 장면을 삽입하던 과거의 영화수법과는 달리 간결하게 표현한 것도 이 영화의 특색이라고 보았다.39)


이만희는 기승전결의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작가가 문장을 다듬듯 영상과 음향의 조합을 통한 영화적 묘사에 치중하는 연출력이 돋보인다.40)


문학작품보다는 상대적으로 순수한 시나리오를 선호한 이만희 감독은 원작을 영화로 창작하였다.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이 원작 「삼포 가는 길」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고 주제의식이 원작에 비해 희미하고 미약하다는 지적41)이 있다. 논지는 <삼포 가는 길>은 줄거리에 충실하지 않았고, 70년대식 로맨티시즘도 아니다는 것이다.

백결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만희는 영화가 영화 본래의 모습을 찾은 것으로 평한다.42) 영화 고유의 영화언어를 찾은 것이며 읽는 영화(문예영화)에서 보는 영화로, 설명하는 영화에서 느끼는 영화로의 전이이다. 소설과 영화는 서사 예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표현의 질료와 방법을 가진 이질적인 예술 양식이다. 원작을 해체하고 재편성하고 각색하고 연출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과정은 이야기와 담론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만희 감독은 리얼리즘이나 휴머니즘, 나아가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본다면 혁명적인 것이다. 이만희 감독은 영화의 리얼리즘, 근대성, 영화의 통속성, 뻔한 진지함과 항상 충돌하며 말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많은 말을 던지는 영화 작가이다. 끝.

※. 참고문헌

 1. 단행본 및 논문

  ․ 신강호, 「이만희 감독 스타일 연구」, 영화연구 22호, 2003.

  ․ 유지형, 『영화감독 이만희』, 다빈치, 2005.

  ․ 우리영화를 생각하는 대화모임, 『만추: 이만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 이영일, “이만희: 철저한 영화작가로 생애 마친 고독”,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3.

  ․ 한국영상자료원,『영화천재 이만희』, 2006

  ․ 변인식, 「작가론/ 필름의 순교자 이만희 / 이만희 감독의 작품세계」, 영화, 92년11월호)

  ․ 안병섭, 예술원 제16회 국제심포지움 주제논문, “이만희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영화예술, 90년 12월호.

  ․ 김미현 편집, 『한국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2004. 개정판

  ․ 김태원 엮음, 『멜로드라마, 조폭, 예술영화』, 현대미학사, 2003.


 2. 수상경력

· [청룡 영화상]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감독상 수상

· [청룡 영화상] 1966년 <시장> 감독상 수상

· [대종상 영화제] 1964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감독상 수상

· [대종상 영화제] 1975년 <삼포가는 길> 감독상 수상

· [백상예술대상] 1966년 감독상 수상

· [백상예술대상] 1967년 <싸리골의 신화> 감독상 수상

 



1) <삼포가는 길, 1975>, <태양 닮은 소녀, 1974>, <삼각의 함정,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청녀 1974>, <1950년 4시, 1972>, <일본해적, 1972>, <영시 0시, 1972>, <쇠사슬을 끊어라, 1971>, <고보이강의 다리, 1970>, <여자가 고백할 때, 1969>, <6개의 그림자, 1969>, <암살자, 1969>, <생명, 1969>, <휴일, 1968>, <외출, 1968>, <여로, 1968>, <창공에 산다, 1968>, <흙바람, 1967>, <원점, 1967>, <얼룩 무늬의 사나이, 1967>, <싸릿골의 신화, 1967>, <삼각의 공포, 1967>, <사기한 미스터 허, 1967>, <방콕의 하리마오, 1967>, <망각, 1967>, <냉과 열, 1967>, <기적, 1967>, <귀로, 1967>, <잊을 수 없는 여인, 1966>, <물레방아, 1966>, <만추, 1966>, <군번없는 용사, 1966>, <7인의 여포로, 1965>, <흑맥, 1965>, <흑룡강, 1965>, <시장, 1965>, <협박자, 1964>, <추격자, 1964>, <묘향비곡, 1964>, <마의 계단, 1964>, <내가 설 땅은 어디냐, 1964>, <검은 머리, 1964>, <한석봉, 1965>, <YMS 504의 수병, 1963>, <열두냥짜리 인생, 1963>,  <돌아보지 말라,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살아있는 그날까지, 1962>, <다이얼 112를 돌려라, 1962>, <주마등, 1961>, <불효자, 1961>. 출처 : 영상자료원. ※이탤릭체 (전쟁 혹은 군인을 소재로 한 영화), 


2) 우리 영화를 위한 대화 모임, 『만추, 이만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13.


3)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집, 2004.


4) 허문영,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씨네21.


5) “멜랑콜리와 무기력이 있는가 하면, 시네필적 현현에 다름 아닌 흥분, 신대륙 발견(장르)과 횡단의 활력, 심리적 도착성과 유토피안적 아나키즘의 공존이 있는 이만희의 14년에 걸친 50여편의 영화는 그야말로 ‘무디’(moody)하다. 세태에 잘 적응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무질서 그 자체인 영화가 있다. 난세에 따르는 시대적 우울과 그에 반하는 저항의 활력의 변주” 김소영, 「씨네21」,  2006.5.12.


6) 우리영화를위한대화모임, 『만추, 이만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175 각주 재인용.


7) 위의 책 145.


8) 위의 책, 134


9) 이영일,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p.272.


10) 각주 1) 참조.


11) 「로케탐방」, 경향신문, 1963년 2월4일.


12) 만추, 11


13) 한국영화사, p.169


14)「주간조선」, 1974.12.8. 기사


15) 신강호, 「이만희 감독 스타일 연구」, 영화연구 22호, 2003.


16) 유지형, 『영화감독 이만희』, 다빈치, 2005 p. 35.


17) 영상자료원, <짧은 생, 끊임없는 영화실험, 이만희 다큐멘터리>, 2002.


18) 만추, 146p에서 재인용


19) 프리미어 본지 32호(11.16~31)


20) 문학산, 「바보의 미학과 중복의 전략, 억압적 국가장치를 징벌하는 싱싱한 웃음의 힘」, 『멜로드라마․조폭․예술영화』에서 재인용, 현대미학사, 2003. p. 165.


21) 분대원들이 전쟁고아 ‘영희’를 돌보고 어린 소녀 때문에 분대원들이 살고자 하는 끈으로 작동하는 것은 다분히 멜로적인 요소


22) 인민군의 포로가 돼 호송 중이던 국군 간초장교들이 도중에 만난 중공군에게 겁탈당하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인민군 인솔장교가 부하 사병과 함께 총격을 가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무의식중에 큰 일을 저지르게 된 그 장교는 앞으로 받게 될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부하들을 설득하여 국군에게 자수하고 포로들을 인계한다.


23) “반공법 위반 혐의로 말썽 되었던 <7인의 여포로>가 부분적인 삭제 및 보충촬영으로 재편집한 뒤 <돌아온 여군>이라고 개제하여 9일 공보부로부터 상영유보해제 조처를 받았다.” 「동아일보」, 1965년 7월 22일,  ‘7인의 여포로 재개제로 상영허가 / 삭제, 보완 촬영’


24) “종로에서 촬영중 감옥 동료를 만나고 그 동료가 탈옥한 줄 알았는데 모범수 휴가제도 이야기를 하더라”, 이만희 만추, p.27.


25) <쇠사슬을 끊어라>, 한국영화주식회사, 감독 이만희, 원작 최관두, 각본 김원태, 출연 : 태호(장동휘), 철수(남궁원), 달건(허장강 ), 마담(윤소라).


26) 조영정, 「만나러가자, 이만희의 쿨한 세계 (+영문)」, 한겨레신문, 2005년10월6일.


27)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169.~171.


28) 한국영상자료원


29) 1966년 전국 단위의 TV방송이 시작되었고 프로레슬링과 레저문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텔레비전의 거센 저항을 받고 있었다.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멜로 드라마가가 번성했고 사극, 공포, 액션, 합작영화 등이 등장한 시기였다. 정치에 대한 관객들의 도피심리 기재로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를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계의 불황은 깊어지고 소재의 제한이 더욱 심각해지자 이에 대한 돌파구로서 호스티스 도는 창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멜로드라마 ‘호스티스 영화’가 1970년대 후반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1974>등이 대표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169.~171.


30) 이만희는 <만추>에서 영화의 본질인 영상과 음향의 효과를 최대한 살렸다. 새소리를 흉내내는 주인공의 음성과 박제된 새를 매치시킨 점이라든가, 창경원에서 호랑이소리를 냈다거나 그런 부분, 육중한 교도소의 철문과 날카롭게 닫히는 핸드백의 소리를 통하여 음향과 공간의식의 대조적인 효과는 유명하다. 이 영화는 김기영(육체의 약속,1975), 김수용(만추,1981)감독에 의해 두 번이나 리메이크 되었다.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31) 백결 각본, 촬영 이석기, 음악 전정근, 감독 이만희. 제6회 대종상 작품상, 여우주연상, 조명상 수상, 아시아영화제 음악상. 퇴역장교 최동우(김진규)은 하반신 불구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그의 아내 이지연(문정숙)은 성불구인 남편을 14년동안 뒷바라지 한다. 어느날 남편 대신 소설을 신문사로 갖다 주다가 강기자(김정철)을 만나고 호감을 가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목격한 시누이(전계현)는 오빠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귀로>는 이감독이 처음으로 제작한 여성 멜로드라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남지 않았던 것은 인물 내면의 욕망과 풍경을 특유의 공간 구성과 미장센으로 담아낸 이만희만의 연출이 있었다. 여주인공은 10년이 넘는 시간을 성불능의 남편을 성실하게 보좌하며 지내왔지만, 한계에 이르고 있다. 이 때 자신에게 접근하는 매력적인 젊은 남성을 만나고,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후, 그에 대한 스스로의 징벌로 음독자살한다. 출처 : http://www.kmdb.or.kr/(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32) 『이만희, 만추』


33) 허문영, 「이만희 감독의 ‘귀로’ 브뉘엘의 ‘세브린느’」, 한겨례신문, 2005.8.24.


34) 만추, 155 재인용


35) 1968년 후반기 우수영화 보상제도에서 문예영화가 제외되면서 원작소설의 영화화 붐은 사라진다. 제작자들은 다시 장르 영화에 주력하였고 문예영화는 쇠퇴하였다. 『한국영화사』p.198~199.


36) 이만희 감독, 유동훈 각본, 김덕진 촬영 / 출연 : 백화(21, 작부), 노영달(28, 뜨내기), 정씨(40, 노동자),


37) 조윤주,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비판 : 영화담론과 두 편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서강대 언론대학원, 1996.


38) 「'영화천재' 이만희 감독의 미개봉작을 만나다-백결 인터뷰」, 오마이뉴스 2006년5월13일 기사


39) 이근삼, 「삼포가는길-전화면에 넘치는 열의와 성실한 인간추구」, 1974년, 영화, p.63~4


40) 만추, 144


41) 문학과 창작,「지금 여기가 낙원일 수는 없는가? - 황석영 원작, 이만희 감독 ‘삼포가는길’」, 1998.06., p. 164~173


42) 만추, 65


43) 백결 각본, 촬영 이석기, 음악 전정근, 감독 이만희. 제6회 대종상 작품상, 여우주연상, 조명상 수상, 아시아영화제 음악상. 퇴역장교 최동우(김진규)은 하반신 불구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그의 아내 이지연(문정숙)은 성불구인 남편을 14년동안 뒷바라지 한다. 어느날 남편 대신 소설을 신문사로 갖다 주다가 강기자(김정철)을 만나고 호감을 가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목격한 시누이(전계현)는 오빠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44) http://www.kmdb.or.kr/(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45)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169.~171.


46) 이만희 감독의 ‘귀로’ 브뉘엘의 ‘세브린느’, 2005-08-24, 한겨례신문, 허문영


47) 만추, 155 재인용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영화천재' 이만희 감독의 미개봉작을 만나다
[오마이뉴스 임순혜 기자]
 
ⓒ2006 임순혜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5월 12일부터 5월 30일까지(19일간) ‘고(故) 이만희 감독 전작전 : 영화천재 이만희’가 열린다. ‘고(故) 이만희 감독 전작전’에서는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 총 51편중에서 <휴일> <귀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삼포 가는 길> 등 22편을 상영한다.

지난해 가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만희 감독 회고전에서 영화 10편을 상영한 바 있는데, 이번 전작전에서는 그보다 많은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된다.

5월 12일 오후 6시 열린 개막식에서 이효인 영상자료원장은 “당대에는 주류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한 명의 비운의 감독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나, 동시대를 같이 살았던 많은 원로 영화인들께서는 기꺼이 그를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가 아주 특별한 감독이었다고 말해주기에, 그 이만희를 기꺼이 ‘영화천재’라고 부르고자 한다”며 “이만희와 한국영화사를 다른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수용 감독은 “이만희 감독은 천재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이만희 감독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전작전을 축하했다.

이만희 감독의 셋째딸인 배우 이혜영씨도 “아버지의 전작전을 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작전을 계기로 아버지를 재평가하고 한국영화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만희 감독을 재발견하는 기회

‘전작전’ 개막작으로는 1968년에 제작했으나 영화가 어두운 내용이라고 문공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당시에 개봉을 못하고,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신성일, 전지연 주연의 <휴일>이 38년 만에 상영되었다.

개막작 <휴일>은 늦은 겨울날, 가난한 두 연인의 어느 휴일 하루를 그린 영화다. 커피 마실 돈이 없어 마른 나뭇잎과 먼지가 흩날리는 공원 벤치에서 만난 허욱과 지연, 가정을 꾸릴 여유가 없는 허욱은 임신한 지연의 수술비를 구하러 친구들을 만나나 거절당한다.

 
▲ 개막식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만희감독 딸 이혜영
ⓒ2006 임순혜
한 친구의 집에 들린 허욱은 친구가 목욕하는 사이 돈을 훔친다. 훔친 돈으로 지연이 수술을 받는 동안 허욱은 술을 마시고 헤매다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병원으로 돌아온 그에게 기다리는 건 지연의 죽음이다.

허욱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어두운 밤 그녀와의 행복했던 한때를 회상하며 거리를 내달리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휴일>은 흑백 필름으로 가난한 두 연인의 휴일 하루를 매우 실감나게 그려 가난하고 암울했던 그 시절의 풍경을 재현해 낸 영화다. 황량한 늦은 겨울날의 바람과 먼지는 두 연인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절제된 대사와 음악, 그리고 배경 등 매우 감각적인 영상을 보여준다.

다음은 영화 <휴일>을 상영한 뒤,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씨와 이석기 촬영감독이 관객과 나눈 대화다.

검열 심해 당시엔 <휴일> 개봉 못 해

- 보신 소감은?

백결 : “38년 만에 다시 보았다. 이만희 감독이 재발견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석기 : “38년 전에 1:1 화면 비율로 찍은 필름이다. 상영 조건과 맞지 않아 화면이 불안하고 거북한 느낌을 받았는데, 원래는 안정된 화면이었다.”

- 미장센이 탁월한데, 이만희 감독은 미리 콘티 작업을 하였나?

이석기 : “철저히 콘티 작업을 했다. 이만희 감독 작업은 특이하다. 믿을 수 있는 감독에게는 맡기고 나중에 감정에 따라 잘랐다. 콘티는 자신이 직접 철저하게 했다. 움직임 자체를 세밀하게 콘티하여 스태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소 헌팅도 대단히 중요시했다. 움직임을 직접 해 보았다. 사전에 콘티를 스태프에게 주고 현장에서 배우를 움직이게 하였다. ‘고개를 몇 번 돌려라’하는 부분까지 자세히 콘티를 썼다. 능력 있는 배우에게는 현장에서 창작을 하게 했다.”

▲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만희 감독, 신성일 주연의 <휴일>
ⓒ2006 임순혜
- 마지막 장면, “이발소에서 머리나 깎겠다”는 장면은 당시 검열을 의식해서였나?

백결 : “원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었다. 프롤로그에서는 한강에서 투신한 시체를 건지고, 죽은 사람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에필로그는 부패한 신성일의 얼굴을 세 친구가 못 알아보고 가마니를 덮는 장면이다. 당시 시나리오 검열이 있어 문공부에서 못 만들게 했다. 그래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양보해서 찍었다.

마지막 장면의 ‘이발소에서 머리나 깎겠다’는 독백장면은 원래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머리를 깎아 군대로 보내라고 하였다. 상징과 은유가 압축된 영화로 당시 개봉을 못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영상자료원에서 공개한 작품이다.”

한국영화에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게 한 감독

- 동대문, 대한극장, 남산 시립도서관, 청계천 복계현장 등 영화의 공간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석기 : “천재란 말이 있듯이 이만희 감독은 대단했다. 특히 작가, 촬영, 조명, 음악 감독을 대동하고 다녔다. 전 스태프들이 작품에 파묻혔다. 어떤 색깔로 찍을 것인가? 항상 만나 토론하였다. 교회당은 서울역 뒤에 있는 교회다. 격하게 찍자고 의논했다. 그래서 카메라, 음악도 불안하다. 스태프들 같이 살았다. 한마디로 이만희 감독은 영화에 미친 사람 같았다.”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찍었다가 포기하였나? 컬러가 보급된 시기였는데, 흑백으로 찍은 이유는?

백결 : “시나리오상 가장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제작자가 문공부에 로비를 하였다. 검열에서 지적되어 촬영 전에 양보했다.”

이석기 : “이만희 감독은 컬러시대에 흑백을 찍은 사람이다. 시네마스코프가 한창인 시기였는데, 스탠더드 흑백으로 가자고 했다. 제작자는 시네마스코프를 요구하였는데 감독이 흑백으로 찍었다.”

▲ <휴일>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왼쪽)과 이석기 촬영감독
ⓒ2006 임순혜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들어갔으면 더 감동적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너무 풍요한데,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하는 모습이 감동적인데?

백결 : “한국영화는 이만희 감독 이전과 이후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만희 감독 이전에는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기보다 문학의 지배를 받거나 연극을 빌려왔다. 이만희 감독에 이르러서 비로소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게 되었다.”

- 주인공이 대사 없이 걸어가는 장면이 많은데, <귀로>의 문정숙도 그랬다. 어떻게 감독과 조율하였나?

백결 : “이만희 감독은 가능하면 철저히 영화 대사를 줄이자고 했다. 연출자가 영화 대사를 따라가면 감독의 이미지를 연출하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 이만희 감독은 말의 내용보다 말이 없는 영상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대사 없는 장면에 상당히 주목했기 때문에 자세히 써주길 원해 열심히 썼다. <만추>에서도 우동집 앞 장면에 대사가 없다. 대사를 절제하는 것이 기본 약속이었다.”

- <휴일>과 <귀로> 모두 우울하고 패배적인 정서인데, 당시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작품을 구상하였나?

백결 : “<휴일>의 가난한 연인들은 내 주변에 몇 트럭 있었다. 너무나 많은 가난한 연인들이 있었다. 추워서 다방에 들어갔는데 커피값이 없어 아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실제 시대의 정서를 영화에 옮겨오고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 한국영화사상 걸작으로 꼽히는 <만추>, 그러나 필름이 유실되어 없다.
ⓒ2006 임순혜
영화엔 천재였지만 가족에겐 고통

- 우울한 음악의 과잉을 느낄 수 있는데?

백결 :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서 옥에 티가 음악이다. 전정근 음악 감독에게 음악을 모두 맡겼다. 음악이 좀 안 맞는 부분은 모든 것을 맡기는 이만희 감독의 성격이 묻어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후시 녹음을 했다.”

- 급격하게 줌인, 줌아웃 하는 부분이 눈에 띄는데?

이석기 : “당시는 손으로 줌인, 줌아웃을 했다. 바람 때문에 손이 움직여 빨리 줌인, 줌아웃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만희 감독의 작업 특징은?

백결 : “이만희 감독은 현장, 집, 구분과 한계가 없었다. 영화작가로서는 천재적이었으나 가족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같이 있는 여자들은 힘들고 견디지 못했다.”

-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백결 : “천재적인 감독이었으나 말년에 불운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제 재발견되어 한국영화사에서 재평가받기를 바란다.”

/임순혜 기자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임순혜 기자는 '미디어운동가'이며 '미디어평론가'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외래교수입니다. 현재 언론개혁기독교연대 집행위원장이며,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입니다. KNCC 언론위원, 크리스챤아카데미 <미디어교육센터>운영위원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운영위원을 지냈으며,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방송위원회 제2보도교양심의위원을 지낸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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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글_ ]  | 오마이뉴스 | 2006.05.13 15:00:00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