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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5 영화교육론_초고
  2. 2008.10.22 완득이, 똥주를 그리워하며
  3. 2008.01.31 프레이리의 교사론
  4. 2008.01.31 프레이리와 대화하기

영화교육론_초고

Literacy 2008.10.25 01:22
 

예술로서의 영화를 청소년에게 페다고지 하기

- 아르또와 들뢰즈의 이미지 비사유를 중심으로


영상학 석사과정 6기 윤정일



- 목차 -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 연구방법 및 연구문제


Ⅱ. 본론

 1. 미디어 근대적 아동기의 종말

 2. 미디어교육과 영화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3. 아르또의 아방가르드 영화의 사유

 4. 들뢰즈 이미지 교육학

 5. 이미지 사유의 페다고지적 실천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예술영화의 사유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청소년에게 영화의 예술을 가르치거나 영화를 통해 소통하려는 교사들이 가져야 할 철학적인 물음은 무엇일까? 교실을 뛰쳐나와 인터넷과 시위현장 등에서 표현되는 현대 한국의 청소년들의 포스트모던 현상들은 획일화된 가치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역습’으로 보인다. 혹자는 미디어는 청소년들에게 소문도 사실로, 거짓까지도 진실로 믿게 만드는 대중조작(manipulation)의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탈근대이론가들의 저작과 상당히 유사하다. 경계의 허물어짐, 자아의 쇠락, 시각 문화의 지배, 사회적인 것의 종말, 이 모든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수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근대주의자들은 탈근대적 현상을 통제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 청소년들의 탈근대적인 징후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예술을 표방하는 영화는 어떠한가? 예술은 분석가능하다는 믿음은 전위적인 예술 앞에서 무너지고 청소년들이 예술영화를 접하기는 힘들며 더구나 교육은 모던한 교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예술 교육은 아방가르드 이후로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영화교육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최근 청소년에게 영화가 텔레비전보다 사회성이 짙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영화교육보다는 비판적 읽기로서의 미디어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1)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한국의 청소년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영화를 많이 본다는 사실은 영화교육 역시 중요한 의제에서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영화는 다른 미디어와 달리 예술성이 크다.

  본 논문은 교육이 예술보다, 청소년의 의식보다 더 전위적이어야 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비언어적인 현대 예술영화를 청소년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페다고지2)에 대한 고민이다. 근대적 교육체계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제언이 아니라 아르또와 들뢰즈가 주장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것이며, 대안교육으로서 영화적 페다고지pedagogey를 고찰해보는 데 있다.

  최근 영화교육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교수법과 관련된 내용이며 철학적 담론이 부재하다. 아르또와 들뢰즈의 영화 담론은 예술영화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교육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대 영화의 무한한 정신적 해방이나 자유의 확장에 관련짓기 보다는, 새로운 교육적인 역동성을 성찰하는 데 있어 이미지, 즉 비언어적 사유이다.

  들뢰즈는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 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유의 대상은 무엇인가? 만약 사유의 대상이 진리라면, 그 때의 진리의 성격은 어떠한가? 들뢰즈에 의하면 “진리는 스스로를 내어주지 않는다. 진리는 드러난다. 진리는 전달되지 않는다. 진리는 해석된다. 진리는 자발적이지 않다. 진리는 비자발적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자 대화’라는 페다고지의 명제가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유효하다. 다만 예술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대상과의 대화이며 단계가 아니고 접근이라는 것은 아르또와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정신이 닮은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객관성, 예측가능성, 제일성의 가치 아래 실증주의 과학을 진리의 잣대로 삼았던 모더니즘을 넘어, 주관성, 개연성, 다양성의 가치 아래 진리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지식의 구성 과정에 주목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영화교육이란 지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식을 통해, 청소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넓혀 나가는 일련의 노력들이다. 새로운 해답과 당장 시작할 처방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고 답답할 수 있지만, 포스트모던 영화교육은 ‘이미지와 대화하고 또 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져 가는 것일 뿐이다.

  매체의 융합과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미디어 소비의 방식의 변화와 아동기의 종말과 함께 청소년기에 변화를 살펴보고, 미디어의 영향에 비판적 읽기를 시도하는 근대적 미디어리터러시와 시네리터러시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포스트모던한 한국사회에서 예술교육으로서 영화교육에서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본 논문의 핵심인 아르또의 ‘이미지’와 ‘사유’에 대한 교육적인 접근을 살펴보고, 청소년 영화교육 담론을 제안하겠다.

 


 2. 연구방법 및 연구문제


  가. 미디어와 청소년의 관계에 대한 선행연구를 분석하여 근대적 관점의 리터러시를 비판하고 포스트모던의 증상을 밝힌다.  

  나. 근대적인 미디어리터러시와 시네리터러시 관점을 아르또와 들뢰즈의 비언어적 영화이미지에 사유에 입각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다. 이미지교육이자 예술교육으로서의 청소년 영화교육의 페다고지적 실천에 대한 담론을 제안한다. 


Ⅲ. 결론


IV.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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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친구가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책을 선물한다기에 강남에서 <완득이>를 골랐다. 국제중학교 설립에다 부정한 선거자금에 말 많은 서울시교육감을 탄생시킨 대한민국 그곳에서 말이다. 시간제교사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학생들은 꼴에 내가 선생이라고 영화감독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묻고는 했다. <완득이>의 똥주를 알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거다.

"하이고 새끼들, 공부하는 거 봐라. 공부하지 말라니까? 어차피 세상은 특별한 놈 두어 명이 끌고 가는 거야. 고 두어 명 빼고 나머지는 그저 인구수 채우는 기능밖에 없어. 니들은 벌써 그 기능 다했고."

영화는 무슨, 다 때려치우고 공부해서 대학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면 완득이는 내가 아는 아이들보다 더 찌질한 놈이다. 카바레에 일하는 아버지와 정신지체 삼촌과 같이 살면서 배운 거라고는 싸움질밖에 없다. 물론 세상을 비꼬는 상상력은 인정할 만하다. <운수좋은 날>을 패러디한 완득이의 독후감은 비틀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첨지가 인력거에 복녀를 태우고 다니면서 성행위를 시켰고, 김 첨지 마누라는 그것 때문에 복장 터져 죽었다.”


 완득이가 똥주를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첫 장면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똥주한테 헌금 얼마나 받아먹으셨어요. 나도 나중에 돈 벌면 그 만큼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벼락 맞아 죽게 하든가, 자동차에 치여 죽게 하든가. 일주일 내내 남 괴롭히고, 일요일 날 여기 와서 기도하면 다 용서해주는 거예요? 뭐가 그래요? 교회 룰이 그렇다면 당장 바꾸세요. 그거 틀린 거예요. 이번 주에 안 죽여주면 나 또 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까지 오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한편의 사회비판적인 코미디 영화를 본 느낌이다. 작가의 언어는 문학적이지 않지만 영화적이다. 유쾌한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멈출 새도 없이 엔딩에 이른다. 호흡이 빠르고 가슴도 따라서 웃고 운다.


이 책을 추천했던 선생님도 그랬다. 자신을 윤리교사가 아닌 윤락교사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한다. 얼마나 똥주가 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완득이가 그토록 증오하다가 사랑하는 교사 똥주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교사다.


나는 겸손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겸손은 용기, 자기 확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합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거나 수치심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가르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신념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


완득이의 말을 빌리면 똥주는 프레이리의 교사론과 정반대에 서 있다. 완득이의 옆집으로 이사와서 심심하면 햇반을 상납하라고 요구하고 사사 건건 간섭한다. 또한 똥주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책이 아닌 현실에서 행동으로 완득이를 이끈다.  


"내가 얼마나 가르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힘있는 자들은 국익에 반대되더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가리지 않고 행해버린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내가 무얼 가르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


이 나라의 교육현장에서 똥주는 지극히 페다고지적이다. 얼마전 장애인영화제에서 학생들에게 경품으로 <완득이>를 나눠줬다. 똥주와 같은 선생이 없는 학교에서 완득이처럼 세상을 향해 하이킥을 날려보려는 친구들이 이 책을 보면 좋겠다.



완득이 상세보기
김려령 지음 | 창비 펴냄
집도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싸움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열일곱 소년 완득이가 성장해가는...철천지원수였다가 차츰 사랑스러운 적 으로 변모하는 선생 똥주 를 만나면서 완득이의 인생은 급커브를 돌게...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프레이리의 교사론 상세보기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 아침이슬 펴냄
20세기의 대표적 교육자인 프레이리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기술한 책. 가르침과 배움이 무엇인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학습자들과 관계를 맺을지, 교육자 자신의 철학과 현실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를 적고 있는 이 글은 편지 형식의 짧은 글이지만, 교육과 교사론에 대한 그의 사상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은 일종의 선언과 같다. 왜냐하면 교사의 과업이 즐거운 일인 동시에 엄중하고, 헌신적인 일이며, 교사의 임무는 단순히 양육의 차원이 아니라 전문적인 과업이기 때문이다.


프레이리는 기꺼이 가르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을 통해 교사로서의 자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관계, 민주적 교육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교사는 자신 안의 신념에 안주하지 않는 겸손함, 모든 부조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장된 사랑,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는 용기 등의 기본적 자질을 갖춰야 한다. 또한 말과 행동간의 모순으로 학습자와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말과 행동간의 일치를 추구해야 하며, 민주적 자세로 학습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사는 민주적 학교를 만들기 위해 절제를 위한 투쟁, 자유를 위한 투쟁,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한 규율을 세우기 위한 투쟁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 교육자로서 산다는 것

- 머리말 : 교육학의 함정
*『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일종의 선언입니다. 제목이 함축적이고 간략해서 제목만으로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여기서 나의 의도는 학습자이기도 한 교사의 과업이 즐거운 일인 동시에 엄중한 일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말로 확대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의 과업은 진지함과 과학적, 육체적, 정서적, 감성적인 준비를 요구합니다.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일에 포함된 과정에 대한 사랑도 개발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은 사랑할 용기가 없다면, 포기하기 전에 수천 번 시도해보는 용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프레이리
, 페다고지 귀에 익은 언어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비롯한 거대담론 혹은 유행담론에 간과했던 페다고지를 이제 읽는다. 이명박정권 인수위에서 주장하는 '영어 공교육 프로젝트'에 혀를 차면서 교원도 아닌 내가 이 걱정 할 시간이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페다고지를 읽기 시작한다. 어쩜 교조론적인 미디어교육론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지도 혹은 낡은 교육방법론에 식상할지도 모른다. 걱정이 되는 것은 지금에 와서야 이분법적인 교육방법에 대한 고민도 만만치 않다.  

페다고지 상세보기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 그린비 펴냄
<페다고지: 피억압자의 교육학, 의식화 교육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책.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헤겔, 루소 등의 대사상가들의 사고와 실천적 경험을 밀접하게 연결지은 의식화 교육론을 제시했다. 저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해방임을 알리고, 평생을 통해 이를 실천한 20세기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 손꼽히고 있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의 삶과 사상

교육철학에 관한 그의 생각은 1959년 레시페 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이후 그 대학의 역사학, 교육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저술한 책들과 레시페의 문맹자들을 가르치는 실험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1964년 군부쿠데타 직후 투옥되고 7년 뒤에 석방된 프레이리는 칠레에 가서 5년동안 UNESCO와 함께 일했으며 칠레농업개혁기구의 성인교육에도 참여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대학원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농촌과 도시 지역에서 새로운 교육 실험을 하는 단체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일했다. 제나바에 본부를 둔 세계교회협회 WCC의 교육부에서 특별자문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첫 저서인 <해방 실천으로서의 교육 1976>브라질에서 출간되었고, 그의 최신작이자 가장 완숙한 저작인 <페다고지>는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소명(프레이리의 용어)은 세계 내에서 활동하면서 그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더 완전하고 풍요로운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그가 말하는 세계란 정태적이고 닫힌 질서도 아니고, 인간이 그저 수용하고 적응해야만 하는 주어진 현실도 아니다. 그것은 노력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도 같다. 더불어 프레이리는 모든 인간은 '무지'하든,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든 간에 상관없이 대화를 통해 타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접촉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 갖춰지면 각 개인은 점차 개인적 사회적 현실과 그 안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현실 인식의 자각과 함께 비판적 대처 능력이 생기게 된다. "사람들은 세계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교육한다" 말은 새로운 힘을 얻는다. 말은 더이상 추상적이거나 마술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변의 것들에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수단이 된다. 프레이리가 말했듯이 각 개인은 자신의 언어를 말하고 세계를 이름짓는 권리는 되찾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프레이리의 사상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두 가지 상황 사이에 간과할 수 없는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선진 기술 사회는 우리 대부분을 급속히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우리를 사회 체계의 논리에 섬세하게 짜맞춰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침묵의 문화'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이다. 즉 '자유의 실천'으로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의 변혁에 참여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우리 사회 내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인간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교육이란 비지시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데, 이는 프레이리가 일관되게 비판했던 입장이다. "나는 농민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굶주림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야 하며, 내 견해에 다르면 인간성에 대한 범죄에 해당하는 그 굶주림의 사회적 형성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농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중립을 지킬 것이 아니라 개입해야만 한다. 하지만 개입하기 전에 먼저 교육자는 정치적으로 명료해야 한다. 예컨대 그래프 Gerald Graff는 이렇게 말한다. "프레이리, 헨리 지루, 스탠리 아로노비츠 같은 급진적인 교육 이론가들은... 편협한 저술양식을 고수하곡 있으므로... 기존 전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조차 걸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지배적인 표준담론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파괴하면서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려는 담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현실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담론은 부정확하고 불명확한 것이 된다. 의미형성 과정에서 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언어의 명료함에 대한 요구는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문제다. 그래서 열여섯 살짜리 소년과 가난하고 무식한 여석은 프레이리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유식학자들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적 특성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저가가 보기엔 '단순 명료한' 언어를 바라는 통속적인 요구는 복잡한 이론적 문제를 회피하려는 또 다른 기계론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이론적 구성물이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표시할 때는 더욱 그렇다.

데이비드 골드먼 David Theo Goldberg는 교육자들이 관점없는 중립성을 취하면 사실상 아무런 견해가 없는 것이므로 갈등, 또는 그와 연관된 어는 것이든, 가르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무관점의 전제는 중립성을 가장해서 지엽적 가치관을 보편적 가치관으로 투사하는 것이며, 스탬과 쇼해트가 말하는 것처럼 자민족중심주의적 가치관을 세계회하는 것에 해당한다.

갈등을 가르치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유일한 준거가 방법론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그 결과로서 그래프는 피억압 민중에게 억압의 정체를 알게하는 것을 교육적 필요 사항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며, 그와 동시에 '소수'에게 힘을 부여하고 특권층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타자화'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다른 주체적 입장과 다양한 사회적 계획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하는 교육학의 정책을 방기하게 된 것이다.

페다고지pedagogy

프레이리가의 교육방식을 요약하기 위해 쓰인  '페다고지 pedagogy'는  그리스어에서 pais '아이'와, ago '지도한다'뜻을 조합한 즉 '아이를 지도한다'는 뜻이다. 보통 사회학과 철학이라기보다는 교육방법, 교수법으로 해석된다. 물론 그의 사상은 헤겔, 마르크스, 그람시, 사르트르의 철학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민주적 문제제기식 교육

파울러 프레이리는 현행 교육의 '은행 저금식 모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민주적인 문제지기식 교육을 제안한다. "모든 사람은 가가자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계발해야 한다. 즉 세계를 정태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변화과정의 현실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그리고 강요된 동화 정책에 따른 복종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문화적 발언권을 되찾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과 희망을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강요된 문화적 이중인격자인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소외시키는 사회 내에서 우리의 객관적 위치를 초월해 주체적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계적인 철학과 정치사상에 반대

억압의 구조를 고발하는 그의 지적 명석함과 용기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이 초기에 했던 계급 분석을 꾸준히 수정하면서도 억압의 상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서 중요한 이론적 범주인 계급을 포기하지도, 저평가하지도 않았다.  비록 모든 것을 계급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계급은 여전히 억압의 여러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점은 계급을 주체의 위치라는 추론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후기구조주의자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그는 모든 분석을 인종이라는 단일한 실체로만 환원하는 본질론적 입장을 거부했다.

<이데올로기 문제 Ideology Matters>라는 책에서 "인종주의의 분석을 사회 계급만으로만 환원할 수 없지만, 계급 분석이 없으면 인종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양자 가운데 어는 하나만을 주장하면 우리가 거부하는 인종주의 못지 않게 경멸스러운 분파주의의 덫에 빠지게 된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교육학교의 교과과정에 주요하게 포함되지 못하는데, 그의 저작이 프레이리가 평생을 통해 반대했던 이데올로기와 관습을 대변하는 실증주의적이고 매니지먼트한 모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리의 선도적인 철학과 정치사상을 기계화시키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많은 사이비 비판적 교육자들이 해방 교육학이라는 미명하에 프레이리를 구호로 삼아 그의 혁명적 정치학을 대화적 방법이라는 공허한 내용으로 제한해버린다는 데 있다. 프레이리를 내세우는 사이비 교육자들은 교실의 경계를 넘어 사회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자는 프레이리의 근본적인 교육학적 제안들의 정수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대화의 인식론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통한 교육

"대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단순하게 기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화란 내가 상대방의 말솜씨를 감안하여 다듬고 깨우치고자 하는 허구적인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대화란 인식론적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화는 앎의 방법이므로 단순히 학생들을 특정한 작업에 열중하게 만드는 술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화에 참여하는 이유는, 앎의 과정에는 개인적 성격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화는 자연히 배움과 앎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대화는 반드시 앎의 대상에 관한 호기심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대화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 아니라 앎의 대상을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화는 각자의 체험을 우선시하는 좌담처럼 변질될 수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위치와 경력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앎의 대상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이런 경우에는, 비록 특별한 이론을 담고 있지는 않더라도 앎의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책들을 직접 애써가며 읽는 과정이 생략된다.

학생이 인식론적 호기심과 더불어 앎의 대상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인식론적 호기심을 증대시켜 앎의 대상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적 도구를 개발하는 작업이 어려워진다. 학생이 자신의 체험을 지식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이미 획득한 지식을 이용해서 새 지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학생은 엄밀히 말해서 배움과 앎의 과정으로서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게 된느 것이다. 사실 앎의 대상을 미리 접해본 적도 없고 인식론적 호기심도 없는데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교사가 학생에게 언어학을 훈련시킬 교육적 조건을 만들어내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지식 내용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훈련 과정을, 학생의 개입과 토론이 없는 권위주의적 강의로만 환원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대화 과정을 관료제화하면 또 다른 기계론을 낳게 된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숄의 발문과 서문에서 발췌>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