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캐테 콜비츠가 한국에 왔군요. 정말 감격적인 소식이네요. 이 전시회 꼭들 가세요. 약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소 및 연락처
address  12 Suong-dong, Jongro-gu, 110-140 Seoul, Korea
110-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12
phone 82-2-720-2223
fax 82-2-720-2224
 
갤러리 오픈 시간안내
갤러리 오픈시간: 10:00 - 19:00
(이외 시간은 전화예약후 방문 가능. 전시중에는 휴일이 없습니다)

찾아오시는길 
버스 :  172, 171,종로 02,종로01, 152,162,151,205
          종로 경찰서 : 2,6,8,8-1,20,84.132,159,205
          331,543,7025
지하철 : 안국역 3호선
 
 
스텝 
       대표 김순협 
       실장 김진호
       큐레이터 이순영

Oliginal und Reproduction

캐테 콜비츠 판화展

2006_0510 ▶ 2006_0606



캐테 콜비츠_임산부_석판화_56×42cm_19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고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510_수요일_05:00pm




갤러리 고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02_720_2223_4
www.gallerygodo.com






이인칭의 관람자: 캐테 콜비츠의 직설 ● 캐테 콜비츠(Kaethe Kollwiz, 1867~1945)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코앞에 이 미술가를 만난 것처럼 눈에 빛을 내던 나의 동료 몇몇을 기억한다. 그 중 하나는 보안사범으로 복역한 이력과 함께 몇 해 전에 발간된 서적에 미중미술가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학에 종사하는 다른 친구는 1986년에 발간된 콜비츠에 관한 저작의 내용을 꿰찼다. 이들은 대개 그녀의 그래픽에 표현된 인물과 장면에서 억압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주목했고 그 뜻을 들으려했다. 이들의 관심은 1980년대 이 땅의 다른 관람자와 별반차이가 없었던듯하다. 1980년대의 의식이 자생하는 내부의 현실적 각성을 토대로 생겨난 것이라면 성숙되기 위해 더 많은 시기동안 지속되든지 아니면 이후의 시기에도 연속될 뚜렷한 암시가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콜비츠를 마주한 지금 나는 일말의 시장기를 느낀다. 뭣보다 콜비츠의 창작물에서 발견되는 분명한 시각적 징표에도 불구하고 왜 들으려고만 했을까? 늦었지만 나는 이제 콜비츠를 보려고 한다. …




캐테 콜비츠_Junges paar(젊은부부)_동판화_30×32cm_1904



캐테 콜비츠_'Eltern'(aus der Folge Krieg)부모_석판화_56×42.5cm_1920


아방가르드에 대한 반응 ● 콜비츠의 생애는 새로운 전통을 선도하는 아방가르드가 극단적 실험으로 미술의 환경을 주도한 때와 일치된다. 그녀는 아방가르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현대미술의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은 채 냉전체제의 독일 양 진영, 이 모두로부터 추앙받았다. 심지어 극동의 중국에서 마저 환영받았고 1980년대 한국에서는 미술이 소통될 것과 뜻이 미술을 통해 현실에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에 강한 암시가 되었다. 몇몇 섬세한 아방가드의 시각과 형식주의적 진화론자들은 콜비츠의 미술이 쉽게 받아드려지고 그만큼 대중적 접근이 용이함에도 그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콜비츠의 매체가 서술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와 거의 동시대인 키르히너(Ludwig Kirchner, 1880~1938)나 후배 벌인 놀데(Emil Nolde, 1867~1956)의 변형된 형태와 칠(painting)을 그녀보다 훨씬 새로운 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봤고 매체의 순수한 본질로 향한 개척자로 이들을 대우했다. 하지만 쉽게 이해되는 콜비츠의 형식적 특성과 인도주의적 주제는 본토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술이 소개되는 곳곳에서 대중적 공감을 유발해오고 있다. 뭣보다 판화와 드로잉에서 주제의 깊이와 창의적 기법간의 통합은 이들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현대미술사의 안정된 지위를 보장하고 있다.




캐테 콜비츠_Selbstbildnis_석판화_36×30.5cm_1920


동판화에서 석판화로 ● 콜비츠는 칠로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근본적으로 그녀를 대리하는 매체는 선묘(draft)와 조각, 그리고 판화이다. 그녀가 처음 그래픽을 시도한 것은 동판화(etching)를 통해서이다. 그 결과 잘 알려진 「농민전쟁」연작(1903~08)을 비롯한 「젊은 부부」(1904)그리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과 같은 특출한 동판화들을 보이게 되었다. 이들 판화는 표면의 조직(texture), 대비, 잉크, 그리고 종이에 대한 그녀의 집중된 관심이 잘 드러난다. 1910년대를 포함하는 그녀의 초기 작 대부분은 16세기 농민전쟁과 19세기 실러지안(Silesian) 지방 직조공들의 소요를 다룬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사건을 주로 주제로 삼고 있다. 1919년 경 콜비츠는 지나치게 세밀한 동판화의 제작을 그만 두고 그것보다 더 단순한 표현수단을 위해 목판화와 석판화(lithography)를 자신의 매체로 선택했다. 이로써 그녀의 제작은 개념적 목적에 이전보다 훨씬 부합하게 되었다. 그녀는 석판에 직접 그려서 판에 이미지가 생겨나게 했고 그 결과 특유의 소묘 양식인 「손길을 기록하는 특질」에 도달했다. 석판화의 단순화된 속성은 그녀가 품은 사회적 문제에 잘 맞았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1차 대전을 분수령으로 1918년 이후 콜피츠는 상당수의 개별 이미지들을 제작했다. 이들은 낙태, 알코올 중독, 전쟁, 도회지 생활의 여건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캐테 콜비츠_Nachdenkende Frau 1(숙고하는 여인) Fassung_석판화_45.5×37.5cm_1920


선의 생기와 형태의 견고함 ● 「직조공의 봉기」(1893~1896)를 비롯한 「농민전쟁」 연작을 포함하는 초기 동판화들에서 콜비츠는 손놀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강인하고 긴 선들을 통해 자신의 주제를 그렸다. 이 선들은 각각의 가닥과 결이 선명하고 얽혀있지 않다. 그것들은 색면의 덩어리를 완성하지 않음에도 명암의 대비, 인물의 윤곽, 그리고 화면의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녀에 의하면 「단순하고 제한되지 않은 방법은」 대상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고 한다. 이는 잘 계획된 무대의 한정된 조명 아래에서 배우들의 무리 진 움직임을 스케치할 때 곧잘 발견된다. 즉 조명에 반사되는 형태와 반짝임이 망막에 감지되는 간헐적이고 순간적인 시지각에 관한 것이라 하겠다. 콜비츠는 상상이나 연상과 같은 기억에 의존해서 완성된 형태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보다 오히려 곧장 목격되는 생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의 독특한 선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독일 사실주의의 전통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은 방법에서 그녀가 자신의 경력을 출발시키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뒤러(Albrecht D?rer, 1471~1528) 이래로 계승되어 온 독일의 사실주의는 자연 대상의 온전한 환각을 위해 제작의 방법이나 재료의 노출을 어떻게 하면 적극적으로 감추느냐에 승부를 걸었다. 그것들이 드러나는 것은 미완성으로 여겨왔다. 격정적 행동과 우울은 전형적 독일식 사실주의와 동일한 주제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제작 공정과 재료의 생기를 노출 시키는 지점에서 선배나 거장과 구별되는 출발을 한 것 같다. 대상을 태연하게 그리고 온전히 관조하기 위한 환각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점에서 콜비츠의 뚜렷한 혁신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한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캐테 콜비츠_Verbruederung(의형제를 맺다)_석판화_32×22cm_1924


한편 그녀의 실천은 이웃한 표현주의자 동료들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환각과 재현을 상당히 포기하고 대신에 광폭한 몸짓과 재료의 분출로 독백에 도달한 것과 대비된다. 콜비츠의 주제는 이들에 비해 여전히 전통적 형상에 의존해 있고 심지어 서술적 삽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외관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이후 그녀의 세밀한 선들을 단색조로 채워진 면으로 대체되고 형상과 배경간의 경계를 견고히 하는 윤곽에 집중함으로써 재현된 형상을 더욱 강화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녀의 구상성(figurative)이 곧장 형식주의자의 비평적 표적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그녀의 판화와 소묘(drawing)가 전통에서 아방가르드로 향한 한 지점이거나 그 양자간의 절충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관람자에게 단숨에 받아드려지고 극명하게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의 직설(literality)을 보임으로써 그 때까지 미술이 시각적 진실을 추구해온 경로를 요약해 보였다.




캐테 콜비츠_Hunger(배고픔)_녹판화_55×34.5cm_1923


관람자를 창출하는 알레고리 ● 1920년 일기에서 콜비츠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아이가 공포에 저려 홀로 울고 있음에도 그 아이를 그렸다고 한다. 그 때 그녀는 그러한 아이에 대한 「옹호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책임이란 곧 끊임없이 쌓인 사람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콜비츠가 자신의 매체를 단순한 감상물이 아닌, 그와 같은 인본주의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간주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녀의 화면에는 핍박의 구체적 대상은 재현되어 있지 않다. 억압하는 주체의 분명한 부재를 통해 억압 받는 대상의 통증을 증폭시킨다. 콜비츠의 매체를 마주한 관람자는 자신의 등 뒤로부터 그 통증을 야기하는 힘을 의식하게 된다. 즉 눈앞에 펼쳐진 생생한 통증의 현장은 가까운 시간 혹은 당장 지금 막 벌어진 참상에 관한 것이다. 관람자는 곧 인근에 그것을 가능케 한 힘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관람자의 창출은 미술의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다. 콜비츠의 선배들이 제작한 매체는 관람자에게 친절하게 재현된 장면을 관조할 안정된 장소를 제공한다. 이때 관람자는 그 매체를 삼인칭의 시점에서 조망한다. 따라서 그 선배들의 화면에 재현된 통증이나 우울함은 관람자에게 태무심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반면 그녀를 이웃하는 표현주의자들의 독백은 일인칭의 관람자를 생산한다. 그래서 표현주의의 화면 앞의 관람자는 항상 불안하거나 그대로 분노한다. 하지만 콜비츠가 생산하는 이인칭의 관람자는 통증에 억눌린 인물들에게 뭔가 직접적 행동을 해주어야 함을 각성한다. 그 실천은 곧 위로, 포용, 혹은 치유와 같은 인도주의적 책임에 관한 것이다. 콜비츠의 화면에서 인물들의 극적 역할이 얼핏 공연을 앞 둔 연극을 설명하거나 무대에 올려진 공연물을 그린 것처럼 보일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상의 재현을 버리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연작이든 개별 단위의 작품에서든 하나의 장면은 그녀의 이웃하는 다른 작품과의 연관에서 인도적 책임의 수행에 관한 각성을 암시하는 뚜렷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그것은 제작의 공정과 매체의 물리적 생기를 유지하면도 주제의 서술을 가능케 한다. 미술가의 몸짓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선이나 윤곽이 서술하는 사건의 현장이 다른 곳, 지난 때의 일이 아니라 바로 「그대」(you)의 일임을 각성시키는 한편 그 억압의 힘과 주체가 추상적 권력이나 시대의 탓이 아니라 바로 「그대」임을 깨우친다. 따라서 콜비츠의 매체 앞에 서 있는 관람자는 치유 받아야 할 대상임과 동시에 상처를 야기한 원이 된다. …




캐테 콜비츠_Abscide(이별)_브론즈_17.5×11.5×3.8cm_1940


사건의 서술적 진술로 비쳐지는 콜비츠의 그래픽은 추상회화와 같은 매체의 순수성을 향한 진화론의 기대에서 받아드려지지 못한 한편, 세기말과 대전으로 말살되는 인간성에 대한 표현주의식의 진솔한 독백이 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상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손놀림의 기록과 소묘로 재료의 생기와 제작의 공정을 자신의 화면에 남기는 직접성을 획득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방가르드에 반응했고 심지어 윤곽의 형태를 견고히 함으로써 시각의 직설을 실현했다. 콜비츠는 이러한 시각의 형식과 현실에 실재하는 문제를 연속되는 장면의 변화와 알레고리로 종합했다. 이는 재현을 점차 버리고 순수성으로 전개해가는 것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한 흐름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재현은 인간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한다. 반면 형식의 순수성은 기억이나 경험과 같은 과거를 개선하려 한다. 이 양자간의 선택국면은 콜비츠 당대의 예술가들이 처했던 난점이었다. 그녀는 이 선택국면에서 그 흐름이 요구한 순수성을 이미 출발에서 시각적 직설을 통해 드러냄과 동시에 기억과 같은 개념성을 재현으로 구성된 알레고리를 통해 실현함으로써 이 양자를 통합했다. 여기서 나는 선택국면에서 물리적 순수성으로 선택해간 미국 미술이 몇몇 절충주의를 정당화한 사례를 기억한다. 재현을 했으되 사물이 된 죤스(Jasper Johns, 1930~)의 절충주의적 애매함이 미술의 새로운 의미를 탄생하게 했다는 지적이 그 사례 중 하나이다. 콜비츠는 시각의 분명한 형태와 개념의 작용인 기억의 연상을 종합함으로써 훨씬 앞서서 이미 그 새로움을 획득했거나 예고한 것이 된다. 지금 여기는 1980년대의 희망과 기대가 단절된 채 그 애매함의 변형물들이 모방되고 난무하고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절충주의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너머에 들려오는 메시지에 지나치게 귀 기우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시장기는 각성의 기회가 지속되지 못한 것에서 생겨난 듯하다. ■ 이희영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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