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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장산에 올라 구름 아래 수평선을 본다. 오후 다섯시, 외롭다. 온기가 남은 너들바위에 앉아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를 읽다가 등이 시린줄도 몰랐다.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찬바람이 내치지만 생각해보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어둡고 좁은 동굴을 빠져나온 촛불이 여기서는 흔들린다. 나름 깊다고 생각하는 이 슬픔은 선생님에 비하면 담배 한 대 진하게 피울 거리도 안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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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상세보기
<b>박경리</b> 지음 | 마로니에북스 펴냄
의 작가 박경리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유고시집! 박경리 유고시집『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008년 5월에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긴 39편의 시를 모아...


산다는 것
- 박경리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들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았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면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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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aggot.prhouse.net BlogIcon 한방블르스 2008.08.26 0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에 낚였는데 <산다는 것> 너무 좋네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왜 몰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