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이 임박한 날, 산을 오른다. 부산에 온 지도 벌써 3년째다. 장산 정상 둘레길을 돌아서 군부대, 억새밭을 지나서 기장으로 간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서도 그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안다. 산에서 하얀미소를 짓는 바다가 보고 싶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을 잡쳤다. 억새가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늘 혼자 오는 길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징그럽다. 산에서 돼지고기 굽는 냄새에 라면까지... 과관이다. 자연을 갉아먹는 바이러스, 내가 밟는 이 길도 그 종족의 폭력의 걸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다. 헬기장 아래 억새들은 사람들 발을 피해서 조용히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차가워진 도시락을 먹고 큰 구름들이 지나가길 지켜본다. 따뜻해졌다가 차가웠다가 그들도 우리처럼 따뜻한 곳을 찾아 뿌리를 내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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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으로 멀리 기장 바다가 보인다. 8년전이었던가,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회상씬을 찍으러 갔던 일이 떠오른다. 일광 어디쯤이었다. 돌탑을 거쳐 산성산에 오르면 선명하게 보이려나. 햇살이 남아 있을 때 기장웰빙공원으로 내려가 대변에서 멸칫국에다 소주한잔 하고 싶다.

기장에서 181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대변에서 내렸다. 햇살이 따뜻하다. 올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 몇 마리나 살아돌아왔을까, 창가에 앉아 원정 간 갈매기가 보고 싶다.  김수영 감독도 이 포구 즈음에서 배우들과 술을 마시며 갯마을을 만들었으리라.

창작이 있는 하루는 즐겁다. 그러나 나는 시원한 멸칫국이 맛있을 뿐이다. 쓰려던 논문이 컴퓨터에 처박혀 있은 지 석달이다. 오늘따라 창 밖 파도는 높다. 나는 왜 새로 태어나지 못했는가. 부산에 와서 훨훨 날아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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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 같은 모양이다. 대변에서 송정을 지나 해운대로 가는 버스를 탄 사람들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본다. 바다가 동쪽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어쩜 바닷가 근처에 살려고 엄두도 못내던 사람들이 부자가 됐다고, 그런 집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다고.

이럴 때는 트롯이 최고다. 181번 버스 안에서 모두들 고개를 바다로 돌린다. '내 님을 앗아간 바다'도 아닌데, 이미자의 노래가 들린다면 좋은 날이다. 뉴스에 끼어든 우리는 횟감을 나르는 아낙의 맘과 같을까.

아내를 잃은 적이 없지만 남편을 잃은 해순(갯마을 여주인공) 맘이 싸하게 와닿는다. 돌볼 자식이 있었다면 창가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겠지. 실업자가 되었다면 맨 뒷 좌석에 앉지도 않았을테지. 창밖은 컬러지만 오늘은 파도가 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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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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