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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5 라캉의 봉합suture 정리

1. 라캉의 봉합

 

가. 라캉의 봉합

1) COMPLETE GRAPH

화어(話語 speech)의 백터로서 주체의 의미화작용 (주체는 말을 하면서, 또는 한 텍스트를 언표하면서 분열되지만 자신을 통일체로 상상하는 의사-동일화를 통해 그 분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 연쇄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충동drive의 백터로서 만족을 추구한다. 두 가지 모두 타자(상징계)를 통과하며 그래프는 그 통과의 경로가 주체 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화어의 백터는 좌에서 우를 향하는 두 화살표 중 아래의 것이다. 그것은 타자(A)를 통과하는데, 타자는 언어의 공시적 차원이며 모든 기표의 저장소이고 주체가 구성되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것에 의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빗금친 주체S/ (주체는화어 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없으므로, 즉 항상 무의식이 존재하므로 빗금쳐진다)가 의미화작용 연쇄를 구두해야 puntuate 하며 따라서 주체는 구성될 뿐 아니라 동시에 구성된다.

주체는 구두 지점 s(A)에서 기표의 미끄러짐의 순간 정지를 명한다. 그것은 공시성이 아니라 통시성에 속하며, 기표의 소급적 컨텍스트화와 도래할 기표에 대한 예기적 구성 속에서 의미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이 순간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 어떤 것은 표현되는 동시에 억압된다. S/ 는 s(A)에서 재현되지만 그 재현은 불충분할 뿐이다. 타자의 영역에서의 주체의 출현은 오직 대역 및 대표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분열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주체는 “자신을 감함으로써 구성되는데” 그 이유는 그/그녀/s/he가 자신의 담론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담론을 구두하면 자신은 그 사건 이후에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 등장 순간에 그/그녀는 다른 무엇으로의 생성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적절한 시제는 “현재 형성과정에 있는 존재보다 앞서는 미래 존재”이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의 주체의 점멸은 결핍을 메울 이상화된 이미지 i(a) 속에서 보상을 찾도록 자그/그녀를 자극한다. 이와 같은 반사 이미지의 원형은 거울 속의 이미지며, 자아 mmoi에 대한 오인을 생산하고 그럼으로써 상상계와 상징계의 접속(접합 junction) 즉 봉합이라 알려진 것을 결과한다.

2) 상상계와 상징계의 결합

분열된 주체(상징계)가 통일된 주체(상상계, 이상화된 이미지)를 찾으려는 시도. 이때 자아의 이미지는 정확하고 빈틈없지만 기만 delusory 이기도 하다.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재생하려는 시도는 결국 자아 - 결코 자아가 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자아 - 에 대한 오인만을 만들어 내게 된다. 주체의 정체성 안에서 야기된 이 같은 불화 (인시과 오인,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불화)로 인한 틈을 메우기 위해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 라캉이 봉합이라고 부른 - 결합이 일어난다.

2) 파열된 틈을 메우는 에고의 노력

상징계는 상상계 항상 공존하는데, 그 속에는 위태로움(‘나’는 사회적인 질서와 상징계의 질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아이가 거울 단계 초기에 느꼈던 희열은 곧 위태로워진다)이 존재한다. 또한 이때 정신psyche 은 단순한 실재가 아니라 상상계의 통일된 존재라는 이상적인 상태를 향한 욕망과, 수많은 갈등하는 힘들로 이루어진 상징계가 부과하는 지식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봉합은 이 두 질서를 하나로 묶고 이 두 질서에 의해 야기된 파열된 틈을 메워서 분리된 상태를 - 즉, 정신이 둘로 나눠진 상태가 되지 않도록 - 결합하려는 에고의 노력을 가리킨다.

 

2. 영화분석에서 봉합 논쟁

가. 쇼트와 역쇼트 : 상징계

1) 장 피에르 우다르(Jean-Pierre Oudart, 1966)는 관객이 영화를 볼 때 ①이미지에 대한 기쁨 jubilation 이고 영화 이미지는 상상적인 풍요함, 즉 “순수한 희열 jouissance의 공간”을 제공하고 관객은 그 속에서 비실재적인 것에 현혹된다. ②영화의 이미지의 경계에 있는 프레임을 인식함으로써 이미지의 주체에 대한 의문, 즉 영화가 언표된 어떤 것으로서 의미 작용이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상황이며, ③ 이런 위협적인 상황을 무효화 하는 것이 바로 쇼트/역쇼트 shot/reverse shot 체계인데, 부재하는 주인공이 역쇼트에서 등장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그제서야 관객과 이미지 사이의 균열이 ‘봉합’된다. 부재자의 위치를 점할 등장인물을 도입함으로써 쇼트/역쇼트는 이미지와 관객의 최초의 관계 속에서 분열을 봉합하고 영화 담론을 상상계 내로 재한한다.

봉합은 영화적 담론에 내재하는 비극성으로서, 영화이미지의 총체성 즉 관람의 쾌락의 총체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런 개념은 영화언어의 비극적 본성을 드러내는지 여부에 따라 영화를 평가하는 경향을 지니는데 <잔드르크의 재판 The Trial of Joan of Arc>을 그런 영화의 예로, <제멋대로인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를 그렇지 않은 영화의 예로 제시했다. 자신의 담론적 과정을 드러내는, 그리고 상상계에서 상징계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영화의 경우에는 관객이 더 이상 텍스트와의 환영적인 관계에 위치되지 않고 영화의 텍스트성을 폭로할 독해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2) 데이언(Daniel Dayan, 1974)은 봉합을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적 형식이며 이데올로기적 기능. 또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인지 못하게 하고 그 안에 흡수한다고 보았다. 봉합을 발화행위 (act of enunciation)라고 설명하면서 영화를 담론으로 이해하고 이는 이미지의 움직임, 즉 쇼트들 사이의 움직임에 말건넴 address라고 설명하면서, 관객은 영화 이미지의 공간적 조직에 따르는 거울 효과에 의한 상상적 지배의 위치 속에서 주체로 구성된다고 이해한다. ①첫번째 쇼트의 부재자는 두 번째 쇼트의 수단으로써 메시지로 유인하는 약호의 요소, ②두번째 쇼트를 대체할 때 부재자는 발화(enunciation)의 단계에서 허구의 단계로 전이되고 그 결과 약호(code)는 효과적으로 사라지고 영화(film)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확보된다. 그 결과 “관객은 ...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에 흡수된다.”

3) 로드만(William Rothman)은 쇼트/역쇼트 체계가 봉합장치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촬영 체계 분석만으로는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밝힐 수 없다고 지적-영화 쇼트 분석으로는 부재자나 영화의 봉합 등을 논의할 수 없다-하면서 할리우드의 규범은 3개 쇼트 시퀀스(관찰자 viewer / 관찰대상 view / 관찰자 viewer)라고 주장한다. 영화 <새 The Birds>의 보데가만 장면에서 ①어딘가를 바라보는 멜라니를 찍은 최초의 쇼트는 그녀가 무엇을 보는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 즉 ②브레너의 집을 보여주는 두 번째 쇼트로써 대답한다. ③세번째 쇼트가 이어지면서 바라본 대상에 반응하는 멜라니를 보여준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부재자가 전혀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점, 즉 ‘이것은 누구의 시점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하나의 주관적 시점 쇼트를 보면서 그것이 주관적 시점 쇼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리고 모든 쇼트가 영화기구에 의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해독하고 표상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능력은 약호의 은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영화는 모든 시대에서 현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몰역사적 제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언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묘사한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허구인 것이다.

3) 밀레르는 주체를 완전한 존재로 매우는 작업을 봉합이라고 부른다. 봉합을 기표의 논리라고 했는데, 주체가 기표의 속성, 기표의 효과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즉 봉합이란 주체의 담론 연쇄에 대한 주체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때 개인이 언어를 통해 주체성을 획득할 때에는 분열되고 여기에 결여(Lack)가 생기는데, 이 결여를 상상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이 봉합이며 봉합의 주체의 분열을 보호한다. 즉 주체가 소외됨으로써, 언어에 편입되는 과정이 봉합이다. 밀레르는 주체를 상징적 질서 안에서 형성되는 것처럼 강조한다. 주체는 상징적 질서와 상상적 질서 사이에서 혹은 동시적으로 개입하는 범주이다. 밀레르는 상징적인 질서 속에서 분리되고 결핍을 경험하는 주체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고, 분리와 상상적 질서에 의존해서 자기 정체성을 얻는 주체의 측면을 간과한다.

 

3. 스티븐 히스(Stephen Heath)의 봉합

1) 상징계와 상상계의 접합으로서의 봉합

밀레르의 봉합개념에 반대하며 봉합이 어떻게 관객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가와의 관계를 중요시하게 보았으며 상상계와 상징계의 결합으로 간주했다. 봉합은 ‘의사-동일화(pseudo-identification)', 즉 가상적으로 주체를 동일화시키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봉합이 상상계와 상징계의 접합이라는 말은, 주체성과 관련된다. 봉합은 주체 부름 address을 생산하는 담론으로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 언어적 발화와는 달리 영화 이미지는 발화의 흔적을 거의 지니지 않으며 그 사실은 영화 이미지를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예증된다. 영화 이미지에서는 그것이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표상을 논박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합 개념은 영화 이미지가 발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지의 외견상의 완전성은 환영일 뿐이며 이미지는 자체의 완성을 위해 언표 행위주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치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주체는 이미지에 결코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재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체는 항상 점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완전성과 완전성의 유희가 바로 봉합 개념이 상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의미의 주체성은 상징계 내에서의 주체의 출현에 해당하는 끊없는 과정 속에서 공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향에서 온 소식> 영화에서 쇼트/역쇼트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도 ‘우다르’와 ‘데이안’의 방식으로 봉합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봉합은 이데올로기 작용을 설명할 수 있으며, 쇼트/역쇼트 방식은 봉합 체계의 하나일 뿐이다.

우다르와 데이안이 봉합작용으로 주장하는 쇼트/역쇼트란 단 한 장면도 없고, 편지를 읽는 어머니가 출연하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등장해서 영화 안의 부재자의 자리는 끝내 누구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그 결와와 부재의 구조안에서도 영화안에 포섭되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이 영화는 알튀세르적인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서 봉합을 이루어낸다. 개인을 주체로 구성시키는 호명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접합지점, 봉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히스의 봉합을 기표 논리의 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상징계와 상상계 안의 주체 관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히스가 생각하던, 라캉에게 올바르게 돌아가는 방법인 동시에 알튀세르의 후예로 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2) 이데올로기적인 재현으로서의 봉합

봉합은 이데올로기 효과로 나타난 것이지,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될 대상이 아니다. 영화는 하나의 재현이기 때문에 그 구축 과정에서 역사적, 산업적,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영화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결정들로 발전되어 영화 내에 ‘기술적이고’ ‘상업적인’ 혹은 ‘예술적인’”이데올로기들을 만들어 낸다.

주체는 말을 하는 순간 소멸된다. 이미지가 완전하다고 믿는 것은 환영이며,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미지들이 구축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재현에 대해서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봉합은 데이언이 주장한 것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이미지로부터 관객 주체에게로 이데올로기적인 효과가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미지에 주체가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재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