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문학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08 지리산 빨치산 루트(220km) 자전거 여행 (4)
  2. 2009.09.12 대안학교 악동들과 함께한 남도기행 (2)

프롤로그

 

이번 자전거 여행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순천과 벌교, 다시 순천으로 돌아오는 루트를 다녀왔다. 태백산맥은 20대 초반에 읽었으니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에서 책 속의 문장을 떠올리기란 긴 여행만큼이나 고된 일이다. 하지만 모진 역사를 살아갔던 인물들의 삶은 나에게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 다가온다. 자전거 여행은 논픽션! 그래서 이번 여행 타이틀은 지리산 빨치산 루트’다.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아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인가.  남도땅에서는 제일 큰 산인 까닭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지리산 빨치산 루트 (220km)

 2011.6.6.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에서 

★ 시간 : 2011.6.4 08:21 ~ 2011.6.6 10:25 (23)

★ 거리 : 220km

★ 루트

0일차 (부산에서 합천, 합천자연학교에서 황매산터널까지 차량 이동)
합천자연학교 - 대병면 - 차황대병로(1026) - 황매산터널

1일차(112km) Jun 04, 2011 :: 8:21 AM - 8:14 PM
http://runkeeper.com/user/dolbae/activity/38069354


장박리 - 실매리 금포림(산청군 차황면 실매리) - 장사익찔레꽃길 - 차황면 - 동의보감로(69) - 산청읍 - 경호1 - 매촌마을 - 한방휴양로(60) - 특리재(산청한의학박물관) - 금서면 - 임천교 - 유림면 - 함양남부로(60) - 임천교 - 둘레길 - 한남교 - 함양남부로(60) - 송문교 - 둘레길 - 모전교 - 함양남부로(60) - 의탄마을 - 마천읍(함양군) - 실상사 - 둑방길 - 입석마을 - 삼화교 - 지리산길(861) - 뱀사골 - 달궁 - 성삼재휴게소 - 천은사 - 매천로(861) - 화엄사로 - 구례IC - 서시교 (둘레길) - 둑방길 - 문척교 - 수달생태로(861) - 문척면 - 간전면 - 섬진강어류생태관 - 간전교 - 석주관로(19, 화계방향) - 섬진강래프팅투어 숙박

2일차(84km) Jun 05, 2011 :: 9:21 AM - 8:12 PM
http://runkeeper.com/user/dolbae/activity/38181106


피아골 - 화개장터 - 남도대교 - 하천리 - 묘동마을 - 중한치마을 - 백운산 - 신재로 - 삼정교 - 옥룡면 - 광양시 - 광양역 - 순광로(2) - 순천시 - 백송 (냉면, 조례동 061-727-4001) - 순천역 - 한신아파트 - 강변로 - 순천만 - 학산리 - 마산리(변량면) - 마산교 - 기찻길옆 도로 - 구룡리 - 명신대학교 - 궁전모텔 - 벌교 -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

3일차(24km) un 06, 2011 :: 6:08 AM - 10:25 AM
http://runkeeper.com/user/dolbae/activity/38275543


벌교읍 - 벌교천주교회 - 봉림교 - 857번도로 - 이곡리 - 낙안읍성 - 58번도로 - 상사사거리 - 연동삼거리 - 2번국도 - 순천종합버스터미널


둘레길을 따라 성삼재 넘어가기


합천자연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바우쌤 차에 자전거를 실어 합천호를 지나 황매산터널을 올랐다. 12km 언덕길을 차로 왔으니 오늘 목표인 성삼재를 넘어 구례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황매산터널에서 차황면(산청군)까지 약 9km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황매산터널을 빠져나와 차황대병로(1026)를 따라 실매리(산청군)까지 10리를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왕버드나무 군락이 보이는 곳에 자전거를 세웠다. 이곳은 금포림이라 불리는 곳으로 오래된 신라말 심어진 왕버드나무가 있다. 신라말 ‘김주’라는 사람이 경주에서 왕버드나무를 가져와 숲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금포림 옆으로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짧은 둑에는 찔레꽃이 폈다. 이 길의 이름은 ‘장사익의 찔레꽃길’이라고 한다. 몇일 뒤 가수 장사익씨가 이곳에 와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하지만 이곳 금포림에도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하얀 버들개지가 뿌려진 금포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나의 애마 '푸른 당나귀'

 

▲ 하얀 찔레꽃은 한국 현대사의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다. 태백산맥의 ‘소화’가 떠오른다. 갯벌에서 노동을 하는 ‘외서댁’도 떠오른다.
 

찔레꽃이 있는 둑방길을 1km 내려온 다음 도착한 곳은 차황면이다. 차황면에서 오른쪽 동의보감로(59번 국도)를 따라서 산청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차황면에서 산청으로 가는 길은 약간의 오르막(4km)이다.

고개에 오르자 산청시내가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태백산맥의 무대에 등장하는 빨치산 루트가 시작된다. 또한 지리산 둘레길의 주요 루트가 있다. 산청읍에 입성하는 길은 내리막이라 젖은 땀을 말릴 수 있다.

 

산청군 오부면에는 일명 팔로군부대라고도 부르는 삼일오부대가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한 이후 잠시 해방구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1951 210, 오부면에서 가까운 신원면 와룡마을 사람들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아군에 의해 100여명이 학살되었다. 같은 날 청연마을에서 70명이 학살당했다.  

 

산청읍내를 통과해서 지리산으로 품으로 파고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지리산 둘레길 ‘수철에서 어천’ 구간 중 금서면에서 오부, 생초, 금서면으로 강을 따라 여행하는 코스다. 두번째는 금서면사무소에서 한방휴양로(60)를 따라서 특집재를 넘는 방법이다. 특집재는 왕산(923m) 허리에 걸린 고개로, 오부에 주둔하던 빨치산이 지리산으로 대피하는 데 이용되었던 루트 중 하나였다.  

특리재를 넘는 길로 접어 들었다. 경치가 좋은 강길을 두고 특리재 고개를 선택한 것은 산청까지 오면서 체력을 거의 소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집재는 금서면에서 고갯마루까지 고도차는 약 200m, 거리는 6km. 무엇보다 그늘이 없고 굽은 길 때문에 라이딩 하기에 힘들다. 하지만 고갯마루를 앞 두고 아름드리 굴참나무가 있다.

 

 특집재로 가는 길. 왼쪽 높은 산이 왕산이다. 사진으로 볼 때는 낮은 고개지만 그늘이 없고 고도차가 200m에 이른다.

특집재 고갯마루 아래에 있는 굴참나무. 조금 더 오르면 동의보감휴게소이고 그 아래에는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정자도 있다.

 

재를 넘어서면 금서면(산청군)이 나온다. 임천교를 건너면 함양군 유림면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길(지리산남부로, 60)과 왼쪽길(화계오봉로)로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왼쪽은 둘레길이 구간으로 동강다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또 한번의 실수! 그 좋은 둘레길을 두고 지리산남부로를 탔다.

강 건너 둘레길이 손에 잡히는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손곡리를 지나면 낮은 언덕이 기다린다. 아스팔트 길이라 도로는 좋지만 햇살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강 건너 둘레길로 갈 걸, 하고선 후회하게 된다.

▲ 산청군 금서면. 금서면 삼거리에서 함양방면으로 가다 보면 임천교가 있다. 임천교를 건너지 말고 좌측으로 강을 따라 가면 동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둘레길이 있다.

함양남부로에서 언덕에서 본 임천강. 강 건너 강둑길을 따라 아름다운 둘레길이 보인다.


엄천교에서 5km 달리면 왼쪽으로 다리가 있는데 비로소 둘레길 코스가 있는 동강마을과 만나게 된다. 동강마을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강 옆 길을 따라 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한남마을(2km), 한남마을에서 함양남부로를 따라 송문교까지 2km.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마을을 맛보며 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둘레길은 둘레꾼들의 길이기 때문에 자전거족이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비포장 내리막길에서는 걷는 사람들과 만나면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둘레길 구간 중에서는 일반 도로가 많기 때문에 그곳을 잘만 이용하면 서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송문교에서 송전마을, 모전마을까지 이어지는 둘레길(4km) 구간은 길이 넓고 아스팔트로 이어져 있어 둘레꾼들에게는 고행의 길이지만 자전거족에게는 시원한 길이다.

둘레길도 모전마을이 있는 용유교에서 끝난다. 60번 도로를 따라서 원정을 지나 금계로 간다. 금계는 매동으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의평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곳이다. 마천면(함양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30. 합천에서 마천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마천에서 자주 들리는 곳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마천 옛날짜장(055-963-3544)집 자장면은 면이 쫄깃하다. 더운 날에는 콩국수도 괜찮다.

 

마천면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길목에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빨치산과 국군의 전투가 잦은 곳이었다. 국군과 경찰은 지리산의 중요한 길목에 해당하는 이 다리에 보루대를 쌓고 진을 쳤다. 또한 어제는 친구였던 이들이 오늘은 적이되어 총을 겨눠야 했던 가슴아픈 시대가 겨우 60년 전이었다

마천에서 산내면(남원시)에 실상사까지는 4km. 착시현상으로 평지처럼 보이지만 바퀴가 잘 구르지 않는 오르막이다. 그래도 실상사 해세교를 건너는 순간 더위는 날아간다.

 

실상사 대웅전 부처께 인사를 드리고 칠성당도 둘러 본 뒤 나의 참새방앗간 절간 안 찻집에 들렀다. 종무소와 붙어 있는 찻집은 작지만 언제나 정겹다. 시원한 오미차를 먹고 종을 하나 샀다. 어쩌면 종은 성삼재를 오르는 나에게 소 같은 힘과 용기를 줄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실상사 오미자차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재주가 있다

 

 찻집에 앉아서 창밖을 보면 버드나무는 연못에 머리를 감고 감나무, 살구나무는 한 잎 줄까 유혹한다.  

 

실상사 앞 연밭에 연꽃은 피지 않았다. 해세교 앞 나무 그늘에 앉았다. 지리산에서 성삼재를 넘는 방법은 또 두 갈래로 나뉜다. 인원을 지나 운봉으로 가서 정령치를 넘은 다음 성삼재로 가는 코스가 있고, 다른 하나는 뱀사골과 달궁을 거쳐 성삼재로 오를 수 있다.

 

돌장생에게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묻지만 답이 없고 나물 파는 할머니들만 말벗이 되어준다. 겨울이었더라면 할머니들의 홍시를 샀을텐데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물 한병과 단호한 판단력 뿐이다.

 

오후 3. 정령치 코스로 간다면 운봉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 판이다. 예전에 운봉까지는 자전거로 갔던 지라 뱀사골 코스로 가기로 결정한다. 해세교 옆 둑길을 따라 신흥, 입석, 삼화마을 길을 간다. 토비스콘도가 보이는 곳에서 다리를 건너 뱀사골로 접어 든다. 야영하는 차량들이 밀려오고 있어서 도로가 제법 복잡하다.

지리산 삼도봉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에 따라 빨치산들은 전북도당(뱀사골, 달궁), 경남도당(대원사골, 칠선골, 중산리골), 전남도당(화엄사골, 문수골, 피아골)  세 도당으로 나눠 책임분담을 맡고 있었다. 나는 전북도당 사령부가 장악하고 있던 뱀사골, 달궁을 거쳐 전남도당이 맹위를 떨치던 구례로 넘어갈 생각이다.
 

  원천마을을 지나면 지리산 국립공원 중에서 북부지역에 해당된다. 여름 지리산의 치맛자락이 계곡까지 내려오셨다.
 

 바퀴에서 뭔가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나서 뭔가 싶었더니 오니열매가 길에 널부러져 있다. 나무를 잡고 오디를 따다가 손과 입이 온통 오디색이다.

뱀사골에서 잠시 휴식을 한 뒤 다시 달궁으로 이어긴 길을 간다. 뱀사골 야영장은 물론 달궁에도 오토캠핑을 하는 사람들로 자리다툼이 심하다. 옛날에는 텐트 크기가 작아서 많은 사람들이 캠핑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오토캠핑족이 늘면서 소형텐트 6개를 치고도 남을 자리를 한 동이 차지한다

달궁야영장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작은 텐트를 소유한 사람들이 캠핑을 할만한 장소가 있다. 소형 캠핑장을 지나면 장작불로 고기를 굽고 있는 식당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심원마을을 제외하고는 민가는 없다
 

달궁은 빨치산들이 씨름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이현상 부대와 규합하면서 남부군이 창설되면서 그 규모가 2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달궁은 반야봉과 서북능선 사이에 있는 요새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달궁은 하대치의 눈으로 묘사된다. 이해룡과 피아골에서 헤어진 하대치는 임걸령을 단숨에 올라 심원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을 먹은 하대치가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였다.

달을 처음 본 하대치와 그의 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골짜기가 갑자기 확 트여 넓어지면서 눈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에 들어와 사흘 동안 줄기차게 골짜기들만 넘나들고 오르내리면서 그런 곳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 운동장처럼 넓은 풀밭에는 천막 대여섯 개가 나란히 쳐져 있었다. 맑게 흘러가는 물과 넓은 풀밭과 울긋불긋 물든 숲과 나란히 쳐진 천막들-그건 그지 없이  평화로운 별천지의 풍경이었다. "옛날 옛적에 여그에 궁궐이 있어서 달궁이라고 헌답디다. 긍께 저 풀밭이 궁궐터였을 것이오. 쩌그 쳐져 있는 천막은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 것이오." 선요원의 설명이었다. "허먼, 이현상 선생님이 쩌그 기신단 말이제라?" 하대치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하먼이라. 나가  도착보고럴 허고 올 것잉께 쉬고 있으씨요." 성원이 다람쥐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돌들을 타고 개울물을 건너 갔다. 하대치는 그때서야 골짜기의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러 온 다른 도당의 대원들이겠거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조정래 『태백산맥』



 

 달궁야영장에서 성삼재휴게소까진 약 9km, 표고차 530m에 이른다. 노고단을 찾는 차들이 많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


달궁에서 2km 언덕길을 오르면 달궁삼거리가 나온다. 정령치로 이어지는 737번 길과 만나게 된다. 달궁삼거리에서부터 성삼재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2km 더 오르면 하늘아래 첫 마을이라고 불리는 심원마을 입구가 나온다. 체력이 된다면 달궁에서 성삼재까지 쉬지않고 오르는 것도 매력적인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대치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는 두 세번 쉬어야 했다.  

 

심원마을 입구에서 성삼재휴게소까지 3km 거리지만 1~3단 기어 변속을 해야 오를 수 있다. 달궁을 출발한 지 60여분이 지난 오후 540분 성삼재휴게소에 도착했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가슴은 울컥댔다.


 지리산을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길, 서른여덟살에 성삼재에 섰다.


 성삼재 아래 시암휴게소에서 내려다 본 구례. 길은 뱀처럼 휘어져 섬진강으로 간다.


   앞서 가는 차들이 없다면 스키활강을 하겠지만 브레이크 타는 냄새가 길바닥에 진동한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고 다시 구례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다. 자동차로 왔을 때는 그렇게 높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막상 내려가자니 브레이크에 신경이 곤두 선다. 천은사까지 내려오는 데만 35분이 걸렸다. 철인이 아니라면 구례에서 성삼재를 오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방광리 (구례군 광의면) 교차로에 도착해서 수한마을(둘레길)로 들어섰다. 해는 지리산을 마주보고 있는 국사봉으로 지고 있었고 넓은 들이 펼쳐졌다. 지리산 아래 곡창지대였던 구례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곳이다. 평화롭게 추수를 하고 있는 이곳도 60년 전에는 전쟁으로 남편을 산으로 떠나보낸 한 여인의 눈물이 있었다.

어쩌면 하늘이 저리도 맑고 푸르고 끝도 없이 깊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하늘의 깊이를 따라 눈길을 길게길게 뻗치고 있는 들몰댁의 가슴에는 까닭 모를 서러움이 차츰 차오르고 있었다. 서러움은 가슴을 채우고 목을 채우고, 입으로 넘쳐올랐다.  추수를 끝내서 더 넓어 보이는 고읍들이 서러움으로 차고, 산들도 서러움 속에 잠기더니 마침내 하늘까지도 서러움으로 뒤덮였다. 그 하늘이 차츰 흐릿흐릿 변하고 있었다. 들몰댁은 무심결에 눈을 훔쳤다. - 조정래 『태백산맥』


 

텐트를 가져왔다면 화엄사 아래 황전야영장에서 야영을 했을 것이다.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무릎은 화엄사로를 따라서 구례읍 서시교까지 페달을 멈추지 않았다. 서시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 해가 지면 의지도 약해지고 편안한 잠자리를 찾게 되는데, 피아골에서 잠을 자기로 하고 페달을 밟았다.

 

  수확을 앞두고 있는 보리밭과 화려한 꽃들이 수놓은 구례의 황금들판

 

  서시교 근처에 파란색 다리아래로 관통하는 강둑길이 보인다. 강둑을 따라 계속 가면 문척교를 만날 수 있다.



  문척교 난간, 섬진강 위에 선 파란 당나귀
 

반동의 시체를 넘고 넘어 / 앞으로 앞으로 / 섬진강아 흘러간라 / 우리는 승리한다 / 원한 위에 피에 맺힌 / 반동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피어나는 / 혁명의 깃말이여  - 조정래 『태백산맥』 '빨치산의 노래'


  

서시교 옆 강둑길을 2km 가면 문척교가 있다. 문척교를 건너면 수달생태로(661)를 따라서 섬진강어류생태관이 있는 간전면까지 이어진다. 구례로 다시 들어가서 편안한 모텔에서 잠을 자고 싶은 욕망이 타오른다. 하지만 지리산을 넘어온 순간 나도 모르게 섬진강을 따라 피아골로 숨어들고 싶어 진다. 피아골은 동학농민항쟁 때 전남의병이 일본군에 밀려 피아골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자 여순사건 때 섬진강을 건너온 많은 사람들이 피아골에서 피를 뿌렸던 곳이다. 또한 전남도당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 산,    산을 옮겨 다니며 고달픈 삶은 부지해가는 화전민이라는 것도 다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이유가 있듯이,  바깥세상을 등지고 피아골로 들어와 다랑이논을 일구어야 하는 사람들도  다 그들 나름으로 바깥세상과 고리지어진 쓰라리고 아픈 곡절들을 간직하고 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선량한 사람들인가는 그들이 일궈내 다랑이논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돌투성이 산비탈들을 따라 일구어진 다랑이 논들, 성품이 선량하지  않고, 정신력이 끈질기지 않고, 몸이 부지런하지 않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흐르는 섬진강을 왼편에 끼고 라이딩을 시작했다. 수달생태로(661)를 따라서 문척면을 지나 간전면에 도착했다. 간전면에서 좌측으로 섬진강을 넘어가는 다리를 통과했다. 섬진강어류생태관은 이미 문을 닫았고 간전교를 건너 석주관로를 따라 피아골로 간다.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전용도로가 없는 좁은 길. 뻗어나온 나뭇가지에 옷이 스친다

야간주행은 피아골을 4km 앞두고 멈추고 말았다. 휴대폰이 먹통이라 지도를 검색할 수도 없고 섬진강에서 차고 오르는 밤 안개가 너무나 짙어 라이딩을 하기엔 무리였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민박집을 찾았지만 빈방이 없어 산속에 있는 민박집에서 어렵게 찾아갔다.

 

 


  참게로 유명한 섬진강 한 민박집 참게 정식개인적으로 참개보다는 밑반찬이 맛있었다.

 

 

백운산 한재(860m)를 넘어 벌교 태백산맥문학관

 

습기를 머금고 있는 숲속에서 하루는 뻐근했다. 새벽에 일어나 피아골 다랑이논을 둘러보고 구례에서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9시에 잠이 깨고 말았다. 어젯밤을 짓누르던 섬진강 안개도 보지 못하고 쌍계사 종소리도 듣지 못했다. 평사리 토지문학관 서희 아씨에게 문안인사도 올리지 못했다. 늦잠을 잔 벌로 따가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라이딩을 시작해야 한다.

 

화개장터에서 아침을 먹고 남도대교를 건넜다. 남도대교를 건너면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광양에 속한다. 섬진강을 왼쪽으로 두고 100여미터 내려가면 왼쪽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자동차로 넘어가지 못하는 길이기 때문에 별다른 표지판이 없다. 이 길은 광양까지 이어지는데 약30km, 표고차 820m. 성삼재보다 300여미터 더 높은 곳을 올라야 한다. 부지런히 가더라도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화개면. 벚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쌍계사가 있고 그 품을 파고들면 삼신봉(1,289m)이 있다.

▲ 화계장터 남도대교 입구에서 본 백운산 한재 가는 길. 하천마을과 중대리 계곡이 어슴푸레 보인다.


하천마을에서 시작된 길은 아스팔트 열기와 신기루 같은 오르막길로 초입부터 의지가 꺾어버린다.
비둘기 부부가 로드킬 당한 양서류와 곤충을 부지런히 먹고 쪼아먹고 있는 풍경은 사막을 횡단하는 듯 하다. 지나가는 트럭에 실려가고 싶은 적이 마음이 서너 번 들었을까, 모정마을 정자 한전정에 잠시 숨을 돌렸다. 한재를 넘는 동안 가게를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을 오른다면 먹을 것과 물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모정마을을 지나면 중한치마을이다. 이곳은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마지막 길이다. 중한치마을부터 시멘트 임도가 시작된다. 1250분 중한치마을을 지나 서울대남부학술림 길로 접어든다. 빨치산들이 지리산을 들어가기 전에 자주 이용했던 길이다. 드문드문 민박집이 보이고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기 위해 자전거에서 내려 신발을 갈아 신었다.

 

한재(860m)는 백운산(1216m)과 또아리봉(1127m) 가운데를 관통하는 능선이다. 아스팔트 길도 끝나고 비포장 길이 시작되는 이곳은 거의 대부분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다. 광양에서 오르는 한재는 경사가 더 심하다. 순천과 광양에서 밀린 빨치산을 백운산을 넘어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순천에서 일단 물러난 반란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에 진을 쳤는데 군경이 도저히  당하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타지 사람들로 모아진 군인은 길을 모르는데다가 지리에  밝은 경찰이 앞장을 서지 않고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란군들은 낮에는 산속에 꼼짝 않고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기습작전을 펴는 까닭에 군경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었다. . - 조정래 『태백산맥』



중한치마을 끝에서 3km 올라가면 그늘이 짙은 작은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드문 산길에 물소리가 요란하다. 일찍 넘어가려는 욕심을 버리고 계곡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물에다 알을 낳는다. 하얀 구름이 고로쇠 손가락을 벌려 벌레들을 숨긴다.

한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30. 남도대교에서 1030분에 출발했으니 거의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한 시간 가량 쉬었으니 세 시간은 타고 끌고 올라온 셈이다. 빨치산은 1시간 이내로 주파했으리라 여겨진다.


 
▲ 모정마을을 앞두고 뒤를 돌아보니 지리산이 같은 눈높이에 들어 온다 

▲ 중한치마을 끝자락에 서울대남부학술림 입구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한재가 있다.



▲ 한재를 오르는 길에 달콤한 계곡이 두어 곳 있다. 그늘에서 커피와 초콜릿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낮잠을 즐겼다.

▲ 오후 230분 한재에 도착했다. 왼쪽으로는 백운산, 오른쪽으로는 또아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 한재 급경사 내리막을 기어서 내려오면 평탄한 길이 펼쳐진다.



▲ 광양으로 가는 도로(11)와 추산으로 가는 도로(8) 갈림길에 붕어빵을 굽고 있는 아저씨. 시커먼 눈썹만큼이나 인심도 좋다. 어묵과 붕어빵 맛에 피곤함을 잠시 잊는다.    


한재에서 광양까지는 22km. 옥룡초등학교까지 13km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아쉬운 건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기 때문에 차들과 가끔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는 데 있다. 광양에서 순천으로 가는 가장 빠른 코스는 2번 국도다. 인도가 있지만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요철이 많고 매연이 심하다.


▲ 순천으로 넘어가는 2번 국도(고속도로?). 광양에서 순천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지만 매연과 요철로 짜증이 밀려온다.


순천에 들어서면 순천만을 통해서 벌교로 갈 수 있다. 해안을 돌아서 벌교까지는 육십리길이다. 순천만으로 방향을 잡기 전에 조례동에 있는 백송냉면집을 찾았다. 조례사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찾게 된 곳이다. 배도 고팠지만 이곳 냉면이 시원하고 맛이 있어 한 그릇을 더 시켜 먹었다.

 

냉면을 먹고 있을 때 머리를 기르고 비쩍 마른 젊은 주인이 자전거를 살펴보더니 어디로 여행을 하느냐며 물었다. 순간 김범우의 모섭이 떠올랐다. 나는 순천만을 둘러보고 순천에서 여독을 풀고 부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시간이 괜찮다면 벌교로 가볼 것을 권했다. 벌교가 순천에서 가까운 줄이야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를 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자전거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순천시 조례동 1598-1번지에 있는 백송냉면집. 이곳 사장 역시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꿈꾸는 사람이다.


그분의 말 대로 벌교를 향해 출발했다. 벌교에 가기 전에 들린 곳은 순천역이다. 순천역은 광장에서 빨치산이 점령하면서 인민대회가 열렸고 이어서 국군이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역 광장에서 몽둥이 휘두르는 사회주의 청년들을 훈계하던 김범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생들은 단숨에 제압한 김범우는 학생들을 잡아가려는 순경을 제지했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 선생이란 존재는 순천 벌교 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수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비는  네 사람을 거뜬히 물리친  무용담도 무용담이지만 학생들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그  네 학생을 극구 변호해서 경찰서에서  빼낸 것이었다. 그 일처리로 하여 좌익학생들도 더 이상의 적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김범우 선생은 좌익에 물든 학생들을 설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극렬한 행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들러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학교의 구분을 두지 않고  노력했다. 좌익조직에서 보면 그는 확실히 눈의 가시였지만 그렇다고 증오스러운 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 조정래 『태백산맥



순천역을 벗어나 순천만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자전거를 탄 부부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골목골목을 헤집고 가더니 풍덕동 한신아파트 맞은 편에 둑길이 보였다. 그 아래에 곱게 빚은 자전거 도로가 있었다. 순천만까지는 8km, 맞바람이 불어서 족히 30분은 걸린 것 같다.


 ▲ 자전거를 타고 순천만으로 가고 있는 외국인들.

 

순천만에 도착하자 하늘을 나는 짱뚱어 미술작품이 반겼다. 순천만은 사람들로 발 딪일 틈이 없었다. 새난들 쪽으로 걸어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대대들 방향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대대들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대대들 둑방을 타고 학산마을까지 10km 길은 장관이었다.

학산리를 지나면 화포, 창산복지회관, 거차마을, 마산리까지 해안도로가 나온다. 마산리 신덕 염전을 지나서 마산교를 넘어서면 철길과 만나게 된다. 순천에서 출발한 철로는 변량을 지나 벌교에 이른다. 빨치산의 장사 하대치가 철도를 파괴하고 열차를 기습하는 장면이 태백산맥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 멀리 보이는 육지 끝이 화포다. 화포로 넘어가는 언덕은 완만하고 언덕을 넘어서면 평지가 펼쳐진다. .

 


▲ 순천만에서 뻘배를 타고 돌아오고 있는 한 어머니.  

 


▲ 뻘을 건너면 구룡리다. 구룡리로 가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마산리까지 갔다가 유턴 하듯 내려와야 한다.

▲ 태백산맥에서 빨치산들의 무용담으로 등장하는 철길. 철길을 따라가면 벌교가 나온다.


 

2번국도를 왼쪽으로 끼고 친환경이라고 이름 붙여진 옛날 도로를 따라가면 철길과 만나기도 하면서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구룡리를 지나 호동리, 소화다리까지 이어진 방죽은 하대치의 아버지가 쌓은 것이었다. 그 길이가 이십 리였다. 농민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땅이지만 일제시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이 되었다.

자신을 한 마리 황소이거니 생각하고 닥쳐올 고난을 이겨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참으로 한 마리의 미련하고도 끈질긴 황소처럼 그는 공사장 일을 이겨나갔다. 아들 대치가 무병하게  커가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고 빛이었다. 그는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될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나날의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세월은 흘러가는  맛이 있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저히 가망없어 보이던 방죽 쌓는 일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이어져 나가더니 마침내 완성의 날이 온 것이다. 포구를 따라 뻗어나간  장장 이십 리가 넘는 방죽은 절로 탄복이 터져나올 만큼 장관이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소작인으로 살다간 하대치의 아버지가 간척한 땅을 보지 못하고 철길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탑 모텔을 넘어서 홍암로로 내달려 벌교에 입성했다. 벌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45, 백운산을 넘어 벌교까지 달려왔지만 꼬막집은 온통 ‘12로 도배되어 있었다
 

꼬막집이 몰려 있는 거리에서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2년 전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보였다. 벌교 꼬막집은 ‘12타이틀을 걸지 않으면 장사가 망할 것처럼 경쟁적으로 붙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감칠맛나는 외서댁, 소화를 가려버린 간판에 실망하고 태백산맥문학관 맞은편 꼬막집으로 들어갔다.


▲ 철로보다 더 붉은 노을이 논에 지고, 멀리 낮은 언덕을 넘어서면 벌교고 있다. 

 

GPS를 멈춘 곳은 벌교 소화다리였다. 100km 이상 장거리 여행을 한다면 ‘Runkeeper’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프로그램이 무겁고 가끔 다운되기도 하고 100km 이상은 표시조차 잘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배터리 소모량이 엄청나다.

▲ 태백산맥문학관 앞 꼬막집. 소화다리 근처에 몰려있는 꼬막집에 비해 한적하지만 맛은 비슷하다.


 

꼬막에 소주 2병을 비우고 비틀거리며 당나귀를 끌었다. 910, 혁명을 막 완수한 빨치산처럼 나는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텔에 들어가서 기분을 잡칠 수는 없었다. 태백산맥문학관 앞 뜰은 자동차 몇 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그때 최부자집 옆 아담한 소화집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섭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소화집으로 들어갔다. 소화집 뒷뜰 장독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매트를 깔았다. 밤이슬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하얀 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무당 소화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잠이 들었다.

 

두 시간 가까이 잠이 들었을까. 대숲이 있는 소화집의 모기들의 공격에 잠이 깨고 말았다. 대숲 사이에는 CCTV가 시퍼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취기가 달아났다. 짐을 챙겨 태백산맥문학관 앞 벽에 다시 자리를 깔았다.

 


▲ 소화집 뒤뜰에서 몰래 비박을 하다 모기의 공격으로 후퇴했다.

 


▲ 문학관 검은 벽 아래서 비박을 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12일로 대표되는 미디어로 홍보간판으로 도배된 벌교 꼬막집. 본래 특색을 찾았으면 좋겠다.

 

새벽 5시 태백산맥문학관을 나서 횡계다리(홍교)를 찾았다. 낙안벌에서 가장 가까운 홍교, 소화다리, 철교 아래로 시간이 멈춘 듯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순천만의 바닷물은 어김없이 하루 두 번 홍교 밑까지 파고든다. 홍교는 소화다리와 함께 태백산맥에서 인물과 인물들을 이어주는 가교였다.

횡계다리 위에 쌀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것은    쌀가마니들을 제일 먼저 본 것은 김범우였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어제밤에 총성이 울리고  있는동안에 그  쌀가마니들이 다리 위에 쌓이고 있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 직후 김범우는 예기치  않은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하대치였다. "가난한 사람덜한테 한 주먹씩이라도  골고로 노놔줘서 설얼 쇠게  허자 고런 뜻인디요, 따른 지주덜헌테야 강제로 쌀얼 뺏어내는 것이제만, 대장님 말씸이, 김 선상님헌테는예 갖춰 우리 뜻을 전허면  선선히 쌀얼 내주실 것이다, 그러시등마요."  하대치란 사내가  막힘  없이 한  말이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김범준은 횡계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읍들녘을 멀리 바라보았다.  황해룡 동지와 함께 물젖은 옷으로 도망치던 기억이 선영하게 떠올랐다.  그때 마침 밀물이어서 포구로 뛰어들어 다리 밑에 몸을 잠그고 있다가  들녘 가운데로 난 개울을 타고 벌교를 빠져 나갔던 것이다. 언제나 긴긴 포구의 갯내음은 고향의 냄새였고, 산으로 에워싸인 고읍들녘은 고향의 모습이었다. 김범준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뒤따르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주오던 서너 사람이 그를  흘끔거리며 비켜서듯 하는 몸짓으로 지나쳐갔다. - 조정래 『태백산맥


하대치가 일행이 그랬듯 횡계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봉림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낙안이고 왼쪽으로 가면 전동리를 지나 빨치산의 해방구 율어면이 나온다. 그곳은 빨치산의 대장 염상진의 묻힌 곳이기도 하다. 갈림길에서 벌교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교 어디에선가 염상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런 개좆 겉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요! 당장에 못  띠내리겄어!"  염상구가 두 경찰의 어깻죽지를 동시에 치며 외친 소리였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호산댁은 솟구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  시동상이 인자 사람이시.” 예상이 뒤집히자 죽산댁도 비로소 고마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 태백산맥 인물들이 횡계다리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다.

 

▲ 보리가 익어가고 있는 낙안들판. 산너머 빨치산의 해방구 율어면이 있다.

 

▲ 낙안읍성민속마을에 들러 곤장을 맞으러 들어갔다. 어젯밤 소화아씨 집에 침범한 걸 사죄드렸다. 끝.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합천자연학교와 대안학교 우다다 아이들 18명과 함께 전라도 소리기행을 떠났다. 모처럼 휴가를 가는 곳이 전라도라  즐겁고도 안타깝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이 거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랜트카 뒷면에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고 붙였더니 죄송한 마음이 조금은 덜어진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해남-강진-보성-벌교'의 소리꾼을 만나 소리를 체험하고 대흥사, 다산초당, 명사십리해수욕장, 보성차밭, 태백산맥 문학관 등을 둘러보는 '전라도 소리기행'이었다.

대흥사 맑은 계곡에서 해남의 소리를 배우다.

해남 대흥사(大興寺,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도착했다. 휴가 끝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한적한 전라도 첫 여행지로서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얼마전 TV프로그램에 소개된 유선관은 예약이 모두 찬 상태라서 근처 민박집(개울민박)을 잡았다.
 
시골 민박집이지만 내부에 화장실과 싱크대가 있고 정원은 주인을 닮아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성수기에 집 한 채(방2칸)를 빌리는 데 15만원정도 지불했으니, 인심이 좋다. 아이들은 옷을 갈아 입자마자 계곡으로 뛰어들더니 '가재다' 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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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물이 맑다고 하지만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보기는 처음이다. 바위를 뒤졌더나 정말 그 가재였다. 아이들은 가재를 가지고 놀다가 방생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초승달이 대흥사 계곡에 안길 때, 해남에서 소리꾼 두 분이 찾아왔다. 이병채(소리) 선생님과 박필수(고수) 선생님은 경상도에서 온 악동들을 위해 짬을 내주었다. 풀벌레 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적절하게 어둠을 적실 때, 이병채 선생님의 소리가 대흥사 계곡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소리에 별 반응이 없다가,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가 싶더니 보슬비가 내리고, 소나기가 내리는가 싶더니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처럼 변화무쌍한 선생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큰 아이들은 얼쑤 하면서 장단을 넣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병채 선생님의 단가,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을 들고서 진도아리랑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산과 초의선사 그리고 민주주의 나무

다음날 아침, 아이들과 함께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그늘을 따라서 대흥사 길을 산책했다. 새벽 운동이 익숙한 악동들은 대흥사를 지나서 일지암(一枝庵을)까지 축지법을 쓰듯 한달음에 올랐다. 일지암은 정약용과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유학과 불교를 교류했던 곳이다.
 

일지암에 앞 뜰에 앉아서 일출을 보는 악동. 제법 폼이 그럴 듯 하다.

 
초의선사는 다산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초의선사는 다산을 따라서 주역을 배웠는데 제자들은 그런 초의선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초의선사는 차 속에 부처의 진리가 있다고 했을 정도로 차는 물론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면서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열려있는 승려였다.  

다산 역시 조선의 닫힌 주자학을 비판하고 실학의 세계로 나아갔다. 다신의 진보적인 실천학문의 바탕에는 중국을 천하로 받드는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쩜 자연스러운 지도 모른다. 

다산과 초의선사가 교류했던 일지암


대흥사에서 일지암까지, 아침부터 조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성가실 법한데 지나가는 스님들이 나무라지 않는다. 아이들이 인사에 합장도 해주고 어디서 왔냐고 물으며 길을 일러주신다. 

전라도에 있는 절 치고는 대흥사는 제법 규모도 있지만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나와 있듯 포근하다. 마치 맏며느리감 같다. 아침햇살은 그 며느리의 미소처럼 따사롭고 만난 스님들도 그렇다. 백성에 의한 군주, 군주를 통한 정치. 그 중에서도 백성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정약용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그를 맞이했을 초의선사의 미소가 컷 인 한다.

다산은 '아래부터 위로', 백성은 하늘의 아들이고 주군이라는 당대에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주자학에 바탕을 두고 엄격한 신분질서를 강조하던 노론 세력과는 극명하게 대립되었다.

다산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정치사상의 씨앗이다. 씨앗은 200년이 지나서야 두 그루의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맺고 또 다른 씨앗을 땅에 뿌리고 자연으로 갔다. 나무를 가꾸는 일은 자연의 몫이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천자를 하늘이 선택하기도 하지만, 백성이 천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나는 그 논리를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운동에 지친 아이들을 내려보내고 절간을 이리 저리 구경하다가 대웅전에 마련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큰 나무에 분향을 했다.


대웅전 섬돌을 내려오다가 오른쪽에 심어진 청아하게 생긴 단풍나무를 보았다. 문득 민주주의 나무라고 부르고 싶다. 여름 내내 하늘(백성)의 기운을 잔뜩 받아 푸르게 무럭무럭 자라다가, 가을에는 제 몸을 사르며 붉은 빛으로 땅으로 돌아가는 이 나무는 내가 아는 두 나무와 닮았다. 

민주주의가 붉든 푸르든 그 무슨 상관이람. 여름이면 푸르고 가을이면 붉다. 그게 이치다. 운명인것처럼. 붉은 가을에 대흥사에 다시 올 수 있다면 자전거를 타고 오고 싶다. 대흥사의 깊어가는 하늘처럼 다산 정약용과 두 나무의 사상을 배워서 내 자람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다. 

대흥사 대웅보전 앞 단풍나무. 나무이름이 참 예뻤는데 기억이 안난다.



씁쓸한 다산초당에서 

일지암을 갔다 왔으니 다산초당(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들렀다. 아이들과 어렵게 산을 올랐는데 초당이 와당으로 변해있는 게 영 실망스럽고 씁쓸하다. 다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보면 '유배 온 줄 알았는데 호강하며 글이나 썼겠네' 하고 말할 것 같다.

깔끔한 현대식 기와집으로 복원된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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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왼쪽 초가집이 다산초당이고 오른쪽이 동암이다.


더욱 웃긴 건 다산초당에 다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그 안에서 차 체험을 하고 있다. 한 잔 마시면서 한복을 입은 안내요원과 이야기 하는 데 아깝지 않은 돈(천원)이지만, 다산이 기와집에서 풍류를 즐길 여유가 있었을까?

퀴즈 : 다산의 목민심서는 기와집에서 완성되었을까요? 아니면 초가집에서 완성되었을까요? 초당의 초는 한자로 超일까요? 아니면 草일까요? 

초호화판으로 바뀐 다산초당에서 풀을 뜯어 먹고 난 기분이랄까? 다산이 상품이 될 것 같으니까 여기저기서 우려먹는데 아무리 좋은 차도 계속 우려먹으면 쓰다는 사실을 모를까? 더 씁쓸한 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최고 관료가 이곳을 왔다 갔다고 한다. 
  
그래도 그곳에 가면 다산이 초당을 떠나기 전에 썼던 글은 바위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글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당히 획이 곧고 날카롭다. 썩어 빠진 관료들을 향해 거침없이 일침을 놓았던 그 나무의 가지와 닮았다. 

다산초당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동암(송풍루) 역시 기와집으로 복원되어 있다. 퀴즈를 갈무리 하자면 다산은 지인이 마련해준 작은 초가집 동암에서 2천여권의 책을 읽으면서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다산은 글을 쓰다가 울쩍한 날에는 백련사에 올랐다. 내가 아는 이는 봉화산 정토원이라는 곳을 자주 갔지 아마. 백련사를 오르는 길에서 멀리 강진 바다가 보인다. 다산이 그의 형(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를 보며 그리움에 사무쳤던 곳이다. 물론 정자는 실제 존재 하지 않았던 곳이다. 
 

동암 옆 정자. 형제의 정이란 건 피를 나누지 않아도 버금간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분신을 잃은 것 같다며 전생에 형제가 아니었을까 했을 정도로 슬퍼했다. 지역감정을 넘어서려고 했던 두 형제의 이야기가 서둘러 갈무리 된 것이 아쉽다



 


서편제와 동편제, 우리소리 경연대회


여행 마지막 숙박지는 보성군에 있는 제암산자연휴양림. 나루호가 발사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아이들은 보성군서편제보존회 회장님으로부터 판소리에 대한 역사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웠다.

섬진강 동쪽 지방(곡석, 구례, 남원)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보성, 진도, 순천)로 나눈다고 한다. 동편제는 꾸밈이 적고 맺음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고 보면, 서편제는 애절한 가락이 많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직접 서편제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여행 기간동안 동행한 홍순연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이제 아이들의 소리를 들어볼 차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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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아이들은 제암산자연휴양림에서 혹독한(?) 판소리 수련을 했다.


우리소리 경연대회는 3명이 1조가 되어서 판소리 춘향가의 한대목인 '사랑가'를 부르는 것. 총 6개 팀이 출전하였고 합천자연학교의 막내둥이 바우가 낀 모둠이 일등을 차지했다. 바우조는 그 상으로 설겆이를 면할 수 있었다.

                 

3박4일, 마지막날 벌교에 들러서 꼬막정식을 먹고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렀다. 기행 기간 동안 기념관의 작태를 보아온 지라 그곳도 그럴까 싶어서 손사래를 쳤는데 다행히 작가의 정신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었다.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지 아이들에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조정래 작가의 추상적인 문구가 시각적으로 실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삶과 소통할 수 있는지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층 전시물을 둘러보다가 아이들이 몰려간 곳은 2층 도서관이었다. 그곳에 태백산맥(만화)을 판타지처럼 읽고 있는 아이들을 눈망울을 보면서, 문학이 재현이 아닌 실현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짧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이제사 블로그에 올릴 수 있어서 무거운 짐 하나는 든 것 같다.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가득 안고서 블로그에 재현해 놓은 듯한 이 야릇한 기분을 접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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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에 있는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작가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원고지에 한 문장이라도 써 보는 체험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옳고 그르든, 서툴든 세련되든 그게 자신이 원하는 바람 혹은 타인은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는 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오며 가며 다녔던 곳과 맛집

해남의 별미 <토종닭 코스 요리>

아이들과 단체로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대흥사에서 차로 10여분 떨어진 한적한 들판에 있는 고수골가든이라는 곳이었다. 간판이 없어서 네비게이션이 아니었다면 찾기 힘들다. 해남 갈비찜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소문난 곳에 먹을 것 없다고 해남에 사는 지인이 소개를 해준 곳이다.
닭을 회로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비릿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고소하다. 토종닭 1마리를 4가지 코스요리로 맛볼 수 있다. 처음에는 닭똥집 비슷한 부위가 육회로 나온다. 다음으로 닭육회, 무엇보다 닭불고기는 닭갈비보다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백숙과 죽이 나오는데, 백숙은 앞 코스에서 살점을 다 내어준 지라 뼈만 있지만 쫀득했다.
이름 : 고수골 가든
위치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골프장, 윤선도 유적지 방향)
전화 : 061-536-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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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케이블카

대흥사에서 10여분 떨어진 곳에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두륜산(703m)을 오를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진도는 물론 제도도까지 볼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무들이 온통 참나무과 활엽수들이다. 지구 온난화의 이유도 있겠지만 200년 전 정약용과 정약전이 예견한 조정의 송림정책을 비판한 대목을 참고해도 좋을 듯 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책에서 몇 구절 인용한다.   

백성들이 나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편안한 길이 나무가 없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인 소유의 산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없게 되었다. - 정약전 <송정사의>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재발췌

생각건대 살림을 사사로이 기르는 까닭은 그것을 사사로이 사용하고자 함이다. 그 벌채를 금하기를 봉산(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벌채를 금한 산)과 같이 한다면 어느 누가 산림을 가꾸겠는가. 날마다 매질하면서 산을 가꾸라고 요구해도 오히려 가꾸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가의 모든 산이 벌거숭이 아닌 게 없고 오직 귀족들의 분묘에만 어느 정도 나무가 자랄 분이다. <목민심서> 공전 산림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재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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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