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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5 영산줄다리기, 아이들의 골목줄에서 희망을 본다.

 

화황산참사가 있은 뒤 영산이 예전 같지 않다. 3.1절이면 울리던 영산의 함성이 작아졌다. 일손을 놓고 뒷짐을 지고 놀이마당을 오르던 노인들도 줄었다. 각양각색의 노점상들도 볼 수 없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일까. 잿더미 위에서 파랗게 고개를 처든 봄날, 3월21일 영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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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제 26호) 전수자 선생님들이 놀이마당에서 줄을 당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3.1문화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영산줄다리기다. 돌아가신 일봉 조성국 선생님 삶 그자체가 이 놀이에 녹아 있고 유희를 넘어 민중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호이징하'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고 순수한 생물학적 행위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의 의미라고 규정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할 때 놀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영산줄다리기는 참여의 놀이이다.

 '영산줄다리기의 내적 원리는 애살(열성)로 만들어지고 신명으로 진잡이를 하고, 몰음(협화)으로 당겨진다.'  -일봉 조성국 -

조성국 선생님은 세상과 담을 쌓고 줄을 꼬는 문화인이 아니라 민속을 넘어서 민족과 민중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다. 비록 그분은 세상에 없지만 아직도 그의 삶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영산줄다리기와 그 맥을 이어가는 전수자들이 살아 있다.

조성국 선생님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출신으로 일제 이후 끊어진 영산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를 복원시킨 장본인이다. 박정희 정권 때 교원노조 활동을 하다 해직을 당한 후 지역에서 농군으로 양파재배법(1972)을 전파해 영산을 양파의 주산지로 탈바꿈하게 했다. 또한 창녕과 영산의 설화와 전래노래를 기혹한 '영축설화'(1974), '영산의 노래"(1975)를 펴냈다.

'공동체성이 상실되고 개성이 강조되면서 문명의 절박함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에서 일봉 선생을 중심으로 한 영산의 자발적인 들풀문화를 통해 자연친화적인 문화적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 부산대 채희완 교수-

영산줄다리기는 한 고장의 문화축제를 넘어서 1980년대 대학의 축제에도 널리 퍼졌다. 1982년 고려대 축제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화여대, 부산대, 서울대 등 전국의 대학축제의 전형으로 번졌다. 그만큼 학생들을 모으기 쉽고 단합과 대동을 몸소 체험 할 수 있는 놀이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대학문화가 사라졌고 영산줄다리기를 하는 대학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다. 이 날 영산줄다리기도 참사의 영향으로 축제를 지양하고 발표회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작년처럼 거대한 군중이 만들어내는 숭고한 예술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골목줄다리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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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줄다리기 전수자였던 김종곤(왼쪽) 선생님이 영산줄을 보고 있다.


조성국 선생님은 영산줄다리기의 축소판인 골목줄다리기에 애정을 쏟았다. 그 역시 지역의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영산줄에 쏟는 신명을 보고 대학으로 줄을 가져갔는지도 모른다.

놀이마당에서 영산줄다리기 발표회가 끝나고 영산초등학교에서 골목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여느 행사와 마찬가지로 연단에 선 선생님은 학생들을 정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참여한 학생들도 마냥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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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줄을 메고 시장으로 가고 있는 영산중학교 학생들


영산중학교 학생들이 골목줄을 메고 한복을 입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어른들의 참여가 적어서 그런 지 골목줄이 아이들 손에 영산시장으로 옮겨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마치 박제된 새끼용 2마리가 시장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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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골목줄이 영산시장에 들어서고 있다.


골목줄다리기에 앞서 진싸움 벌어졌는데 시장 골목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골목줄이 당겨지는 순간 박제된 용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합세했는지 동네 주민들도 줄을 당겼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동쪽이 지면 서쪽으로 붙어서 줄을 당겨준다. 조성국 선생님이 말씀하신 ‘애살’ ‘신명’ ‘몰음’을 체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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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줄다리기가 영산시장에 들어오자 동네 주민들이 흥겨운 춤사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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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에 앞서 진잡이 놀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골목줄다리기를 통해서 노동의 즐거움을 체험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아이들이 신명과 흥이 절로 났을까?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뒤로 하고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메스게임을 즐기는 3인칭 관객의 시점이 아닌 함께 참여하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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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줄다리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


영산줄다리기는 참여의 놀이이다. '호이징하'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고 순수한 생물학적 행위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의 의미라고 규정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할 때 놀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따금거리는 지푸라기가 옷 속으로 파고드는데도 놀이에 몸을 던지는 ‘애살’, 경쟁이 아닌 ‘신명’으로 상대를 인식하고 용이 똬리를 틀듯 서로 엉기어 붙어 줄을 당기는 ‘몰음’을 골목줄다리기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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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어린 아이들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놀이를 하고 있다.


놀이 자체가 파괴된 오늘날, 그나마 골목줄다리기가 있어 다행이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신명’을 느끼게 해준 영산의 아이들이 고맙고도 대견하다. 또한 놀이 구조를 만든 선생님과 영산줄다리기 전수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내년에는 어서 빨리 아픔을 치유하고 한바탕 축제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