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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교육론-1

Literacy 2008.07.09 22:52

 

미디어의 이해(현대사상의 모험 8) 상세보기
마셜 맥루언 지음 | 민음사 펴냄
캐나다 출신의 문명 비평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마셜 맥루언의 저서. 음성 언어, 문자 언어, 의복, 주택, 인쇄, 만화, 사진, 신문, 광고, 전화,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글을 통해 오늘의 미디어에 관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비언어적 형태>로서의 영화는 <문장 구성이 없는 진술>의 형태로서, 사진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활자나 사진처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문자 교양 수준이 아주 높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자 문화적 인간을 당혹스럽게 한다. 카메라가 이동하여 인물을 쫓거나 인물을 시야에서 빼버리는 것을 문자 문화적인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필름 끝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자 문화적인 관객들은 선형성의 논리를 의심하지 않고 한줄 한줄 인쇄되는 마음의 이미지를 뒤쫓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필름에 나타나는 연속적인 움직임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르네 클레르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무대 위에 두세명의 인물이 있을 때 극작가는 언제나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동기 부여와 설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의 관객들은 책의 독자들처럼 그저 단순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카메라가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모두 받아들인다. 그들은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르네 크레르가 말한 것처럼, 영화의 스크린은 아름다운 환상과 청춘의 꿈이 가득 찬 하렘 harem을 향하여 그 <흰문>을 연다. 이에 비하면 현실은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점을 가지고 있고, 예이츠는 <플라톤은 자연을 사물의 환상 양식 위에서 노닥거리는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어느 시에서 명시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유추해볼 때 예이츠는 영화를 영사기가 그 <거품>을 희롱하는 플라톤적 이상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았음에 틀림없다.  

미개인은 표음 문자 문화와 선형적 활자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글자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사진이나 필름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사실, 런던 대학 아프리카 연구소의 윌슨 John Wilson은 필름으로 아프리카인에게 그들의 문자를 가르치려고 여러해동안 노력해 왔으나, 그는 필름 보는 방법을 배우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 더 쉬운 것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화면을 <보는> 방법을 학습한 뒤에도 우리의 시간 관념이나 공간적 <환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 The Tramp>란 영화를 본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마법사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그 영화 속의 한 등장 인물이 머리를 세게 맞았지만 조금도 다치지 않고 무사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카메라가 이동하면, 나무가 움직이고 있거나 또는 건물이 커지거나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간이 연속적이고 획일적이라는 문자 문화적인 전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원래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원근감이나 거리감을 만드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의 원인과 결과를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인 힘으로 어떤 것을 밀면 그것이 또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비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은 이와 같은 <효율적>인 원인과 결과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마술적 결과를 가져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에는 매료된다. 외부적인 것보다 내부적인 것이, 비문자 문화적이고 비시각적인 문화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 문화적인 서구 세계는, 자신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미신의 이음매없는 그물눈에 사로잡힌 세계로 보는 것이다.

또한 아프리카인은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토키는 소련의 영화 제작에게는 파멸을 알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후진적 또는 구술적 문화인들처럼, 러시아인은 깊이 참여하고 싶어하는 저항 불가능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시각 이미지에 소리가 부가되면 이것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푸도프킨Pudovkin과 에이젠슈테인은 발성영화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약 소리가 상징적으로나 대위법적으로 서로 대비를 이루며 사용된다면, 시각 이미지는 보다 적게 손상될 것으로 생각했다. 집단적으로 참여하고 노래하고 소리 지르고자 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욕구는 필름과 함께하는 사운드 트랙에 의해 완전히 좌절된다.

반면 서구인에게 토키는 단순 소비품으로서, 시각적 기성품을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무성영화를ㄹ 볼 때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종결(자기의 상상력을 사용하여 픽션의 세계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또는 완결화의 작용으로써 소리를 첨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가 이미 자신들을 위해 들어가 있을 때에는, <이미지의 작품>인 영화 속에 자신들이 참여하는 정도는 훨씬 감퇴되는 것이다.

비문자 문화인은 또한 서구인과 달리, 영화 스키른 2-3피트 앞에서, 또는 사진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눈을 사진이나 시크린 위로 움직인다. 유럽의 남성이 미국 여성에게 매우 <섹시>해 보이는 것은 눈을 손처럼 사용하는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극도로 문자 문자 문화적이고 추상적인 사회만이 시점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쇄물을 읽을 때 시점을 고정시키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점을 정하면 원근감각이 생기게 된다. 토착민들의 미술에는 대단한 세밀함과 공감각이 나타나 있으나 거기서 원근감은 찾아볼 수 없다. 누구나 원근 감각으로 사물을 보고 있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처음으로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는 예로부터의 확신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텔레비전 제1세대인 우리는 시각적 원근법이라는 이 감각 양식적 습관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함에 따라, 시각적으로 획일적이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가진 독특한 세계의 말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그 후로 진지한 광고에서조차도 언어 유희와 재담 같은 것에 열중하게 되었다.

인쇄물 같은 다른 미디어에 비하면, 필름은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필름은 여러 페이지의 산문을로 묘사할 수 있는 인물과 풍경이 담긴 한 장면을 순식간에 제시한다. 필름은 상세한 정보를 이렇게 잇달아 되풀이해 갈 수 있지만, 한편 말을 표현 수단으로 삼는 작가는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를 커다란 덩어리나 <형태>로 독자에게 제시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진이 화가로 하여금 추상적이고 조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것처럼, 필름은 작가로 하여금 필름이 대항할 수 없는 말의 간결성과 깊은 상징주의를 향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