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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4 시립미술관에서 들뢰즈와 데이트 하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들뢰즈와 약속을 잡았다. 약속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나의 구애다. 나는 그에 대해서 정확히 모른다. 그의 이론으로 논문을 쓰려다 나에게 적당한 안내서 한권을 발견했다. 박성수 교수가 쓴 <들뢰즈>는 영화와 관련된 그의 철학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Bergsondml <물질과 기억> 스캔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 이론을 <영화>에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들뢰즈> 박성수, 이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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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사물 사이에 이미지가 존재한다.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저 존재하는 것도 이미지다. 이미지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놓여있으며 객체(사물) 보다는 덜 존재하는 듯하고, 주체 또는 의식보다는 더 존재하는 듯한 중간적인 성격이다. 세계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는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작용을 가하고 받는다. 거기에는 법칙도 없고 단지 우연적인 충돌만이 존재한다. 뇌는 이미지들의 작용에 대해 뺄셈subtraction 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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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 SLR로 무장한 시민군들이 지나간다. 들뢰즈는 사진의 예술성에 대해서 사진의 경우 결코 인간이라는 예술적 주체와 비슷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기계적인 이미지 장치는 새로운 미학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기존의 예술개념 그리고 예술 주체에 대한 개념 그리고 예술 주체에 대한 개념이 변해야 한다는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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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개념적 사유의 능력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되고 길들여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념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해버리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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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Epstein은 반철학anti - philosophie으로 불린다. 그에게서 영화는 일종의 지적 작용을 하는 로봇이다. 영화는 감각 능력을 가진 로봇이다. 감광을 통해 필름에 이미지가 기록되는 것은 일종의 기억 능력에 속한다. 그리고 현실을 일정한 공간감과 시간적 진행, 내러티브의 인과관계 등을 통해서 재구축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감각, 기억, 사유 능력과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이 인간의 것과는 다르게 또 그러한 능력을 넘어서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계적 낯설음(타자성 ; 각도, 촬영속도, 편집방식)은 숭고이다. 다만 칸트의 숭고처럼 조화의 가능성은 영화의 가능성이 아니라, 영화는 결코 재통합을 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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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대상을 지각할 때, 칸트의 미적판단 숭고 die Erhbene, sublime(대상을 파악하고 포착해서 종합하는 능력의 와해에 관련된 것, 보다 높은 능력의 환기를 통해서 쾌감으로 전화되는 조화의 관점)에 이른다. 숭고는 때로는 불쾌감을 유발시키지만 보다 초월적이고 상위의 능력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재차 쾌감을 낳게 만든다. 숭고는 우리의 인식과 능력에 대한 한계를 지시하는 한편, 세계라는 대상에 대한 낯설음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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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숭고는 일정한 조화와 안정을 되찾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면, 료타르 등에 의해서 강조되는 것은 그와 반대의 방향이다. 료타르는 감각을 복권시킨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자기 지시의 문제에 얽혀있는 역설은 감각을 대조시킨다. 감각은 어떤 자기 지시성은 결코 어떤 역설에도 빠지지 않는다. 논리적 추론은 한계에 도달해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역설이라면, 감각은 동일한 구조에서도 전혀 곤란하지 않다.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예술주체는 뺄셈을 수행하는 것일뿐, 거대한 종합과 추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빈 캔버스 안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무한한 잠재성들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영화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차이를 사이에 두고 훨씬 우위에 서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미지들의 우연적이고 전면적인 운동은 인간의 뇌라는 이미지와 마주칠 때 범위가 제약되고 감소되며 한계가 지어진다.

그것은 카메라라는 이미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미지들의 운동은 일정하게 프레임 안으로 한정되어진다. 하지만 우리의 뇌를 통한 제한과 감소의 경우와 카메라를 통한 경우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뇌는 우리 몸에 부착되어 있고 무한하고 다양한 이미지의 운동을 지각의 형태로 제한할 때 우리 몸의 위치에 관련시켜서 제한과 뺄셈을 한다.  그런데 몸은 일정한 지표면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협소한 시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시점의 이동 속도 또한 느리다. 그는 이것을 정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카메라는 시점의 한계도 상당히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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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는 카메라-눈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기계적 시선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세계에 대한 시점 자체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몸에 기댄 시점은 언제나 제한적이고 국지적인 시야만을 확보해 주었는데, 만을 어떤 면에서 사유를 제약했다면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다.

베르토프는 ‘영화-눈’은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선의 해방시켰다고 선언한다. 벨라 발라즈는 Bela Balazs가 영화가 예술의 역사에 가져다 준 해방의 시점과 일맥 상통한다. 들뢰즈는 위의 논의를 이어받고 있지만 ‘이미지 존재론’을 통해 보다 철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무한한 이미지들의 카오스적인 존재 상태로서의 이미지와, 인간이라는 뺄셈적인 감속장치를 통해서 일정하게 질서를 부여받는 정박점anchorage 둘레에 배치된 제한된 이미지다. 전자는 어떠한 특권적인 중심 따위에 관련되지 않아 절대적인 체제이다.

영화가 제공하는 이미지는 그것이 일정한 정박점을 가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비확정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이미지 체제에 접근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인간의 지각에 대하여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미지 존재론에서 이미지들의 작용과 반작용을 ‘세계’라고 보았다. 거기에 감속매체로서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이미지는 작용에 대해서 그대로 반작용하지 않고 선택작용을 수행한다. 그래서 스크린 또는 뺄셈장치라고 불린다.

 하지만 인간은 유예하고 억제할 수 있다. 정서라는 이 영역은 행위의 무능력을 지시한다. 즉 자극 또는 작용으로서의 지각,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또는 반작용으로서의 행위, 그리고 그 중간에 지각의 수용이자 행위의 무능력인 정서 3단계가 존재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세 단계를 영화에서 적용한다.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를 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 행위이미지로 분류한다.

먼저 지각이미지를 살펴보면, 주관적 쇼트와 객관적 쇼트를 살펴보면 전자는 일인칭이고 후자는 삼인칭 시점에 각가 대응된다. 바흐친Bakhtin이 말하는 자유간접화법이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혼재를 나타낸다면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이란 주관적 쇼트와 객관적 쇼트가 섞여 있는 경우다.

내러티브 이론에서 주관적인 쇼트에서 객관적인 쇼트로 바뀌었지만 쇼트의 연속적 전개 내부의 어디에서 바뀐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즉 혼재하는 자유간접화법과 유사하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이러한 자유간접화법을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별이 불가능해지는 연속체의 상황으로 파악한다.

영화가 사람의 지각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주관성에서 벗어나 객관성 또는 이미지의 절대적 체제 쪽을 지향해서 움직여가는 미묘한 변이들이 영화에 존재하는 한, 영화는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인간의 지각보다 우선한다.

이것은 이미지 뿐만 아니라 소리와도 관련된다.

 들뢰즈가 보기에 영화의 이미지, 즉 ‘시점의 혼재’라는 특징이 인간의 지각보다 우월한 까닭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내재성의 평면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Posted by 노마드 따따와 철따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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